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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김영한이 산 김기춘을 잡다?…발목잡힌 '왕실장'

24년 전 겨울 김기춘(77)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부산의 정·관계 인사들과의 식사 자리를 주도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2년 12월이었고 장소는 부산 남구 대연동의 초원복집이었다. 김 전 실장은 이 자리에서 역사에 오래 남을 말을 한다.

"우리가 남이가."

모임에서는 지역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의 당선을 돕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관련 내용은 경쟁 후보 측을 통해 공개됐고, 불법선거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논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법 도청 사건으로 본질이 뒤바뀌었고, 보수가 결집했으며, 김 당시 후보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탁월한 여론몰이의 결과였다.

김 전 실장은 이후 탄탄대로를 달린다. 초원복집 모임 참석자 중 유일하게 재판에 넘겨졌지만, 당시 대통령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냄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뒤였다.

하지만 24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이번에는 망자(亡者)의 비망록이 김 전 실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실세가 떨치던 위세가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메모 때문에 운신의 폭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김 전 수석의 비망록에는 김 전 실장의 지시 사항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지시의 범위는 정치, 사회, 문화 등 온갖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특정 변호사에 대한 징계를 지시하는 정황, 특정 보도를 내보낸 언론을 압박할 것을 지시한 정황도 드러난 상태다.

특히 비망록에는 김 전 실장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개입한 정황도 드러나있다. 지난 2014년 10월4일 김 전 실장 지시사항 표시와 함께 '통진당 해산 판결-연내 선고'라고 적혀있는데, 며칠 뒤 박한철 헌재소장이 실제 연내 선고 방침을 밝힌 것이다. 해산 선고 이틀 전 헌재의 결정 내용을 김 전 실장이 언급한 내용도 비망록에 담겨있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이런 내용을 접한 여론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박 대통령 최측근으로서 최순실(60·구속기소)씨 등의 국정 농단 의혹을 방기한 책임을 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 농단을 돕거나 주도한 장본인이란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시민단체들 역시 김 전 실장에 대한 고소·고발장을 특검에 제출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20일 소속 변호사에 대한 부당한 징계를 지시한 혐의로 김 실장을 고발했고, 21일에는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등의 고발이 예고돼 있다.

여러 수사 대상 중 김 전 실장의 혐의 입증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했던 박영수(64·10기) 특별검사팀 역시 비망록에 주목하고 있다. 김 전 실장에 대해 이미 출국금지도 한 상태다.

김 전 실장이 평소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논리를 배척해 온 만큼, 비망록에 적힌 메모들을 역추적해 들어가면서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비망록에 적힌 김 전 실장의 지시사항이 현실화 됐는지, 어떻게 실현됐는지 등을 역추적해 가다보면 결국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이겼듯이 생전 청와대 근무 당시 김 전 실장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망자(김영한)가 결국 살아있는 김기춘을 이긴 셈"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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