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 隨筆] 포도 이야기

2002.12.02 00:00:00

- 이규흥, 청주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의 입도 삐뚤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밤으로는 찬 기운이 돌아 밤벌레 제철을 맞은 듯하다. 아무래도 가을은 사랑의 계절인가 보다. 아직은 풀벌레가 본격적으로 울어대는 것은 아니고 간간이 아주 서서히 잊혀진 사랑을 길어 올리라고 분위기를 띄우는 중일 것이다.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하다 보면 유년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물가물하지만 가슴 저 밑에 지워지지 않는 호수가 하나쯤 남아있을 것이다. 첫사랑이라, 중년의 나이에 웬 첫사랑 타령이냐, 혹시 더위 먹은 것 아니냐고 따질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알알이 익은 토실토실한 포도가 첫선을 보이는 이맘때가 되면 나의 첫사랑은 어김없이 반추되고 잔잔하게 흔들리는 첫사랑의 호숫가는 그 날의 아릿한 추억에 휩싸이게 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나의 홍역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간다.

시골학교라서 학생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다들 고만고만하여 크게 눈에 띄는 아이가 없었는데 어느 날 여학생이 전학을 온 것이다. 성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름은 영희였다. 영희란 이름은 철수와 함께 국어 교과서에 바둑이와 놀고 있는 이름이다. 그 영희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흙이나 돌을 만지는 장난이나 딱지치기, 자치기 이런 것이 놀이의 전부였던 나는 언제나 꾀죄죄하였으나 그녀는 하얀 얼굴에 상냥하고 반듯한 말씨하며 잘 차려입은 옷이 금방 어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 영희가 나를 이성에 눈뜨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단비가 모자라 비트는 나무처럼 여름 내내 말라갔다. 하루라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못한 날은 우울한 날이었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포도나무 그늘에 앉아 그녀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쓰기도 하고 그리기도 하였다.

' 0 영희, 영희, 희', '♥'

그때마다 포도는 익어갔다.

내가 우울한 날에도 내가 즐거워하는 날에도 서서히 포도는 익어갔다.

포도가 온다
팔월이면 알알이 익은 그리움
덮어두었던 빠렛 열고 포도 알 같은
얼굴들이 올라온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우면 지울수록 더욱 번지는
첫사랑이 올라온다
나는 유년의 날들을 맑게 닦으며
한 알 한 알 그 포도 알 삼킨다
퉁퉁 그리움이 부어오른
편도선 그 너머로
내 첫사랑을 삼킨다
포도가 온다
마알간 포도 알이 올라온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맛있는 포도를 먹고 있다.

아이들은 단맛으로 먹고 아내는 포도원 주인을 생각하며 먹고 있는데 나는 첫사랑을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아이 정호가 묻는다. "아빠, 포도 먹으며 무슨 생각하세요?"

"생각은 무슨, 너희는 아직 모른단다. 더 있어야지!"

'그렇지도 않은 걸까? 접때 저네들이 순결교육을 다녀왔다지, 아마 너희들도 벌써 이성에 눈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큰아이 건호가 묻는다. "아빠, 첫사랑 있었어요?"

'저놈 보게, 재가 5학년인가? 그렇구나, 나도 그 때 5학년이었으니까… 어쩐지 저놈이 이메일을 감추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야. 이미 이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내가 묻는다. "여보, 대청댐 포도, 올해는 더 많이 좀 팔아주셔요? 그 사람(포도원 주인)들 생각하면 비싸도 많이 먹어야겠어요. 워낙 맛있는 포도니까 힘들지 않을 거예요!"

청남대로 알려진 대청댐은 청정구역이다.

새벽이면 안개에 젖어 커다랗던 호수가 금세 사라진다. 하늘만 빠끔한 청원군 문의면 대청댐 산골에서 포도는 자랐다. 날마다 안개를 먹고 자랐기에 피부가 야들야들하고 육질은 단단하다.

몇해전부터 대청댐 포도를 알게 되었는데, 젊은 청년(비오)이 포도 알 같은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애써 가꾼 대청댐 포도, 나는 이 포도를 맛보게 되면 어김없이 청량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잘 지은 농사일지라도 판로 때문에 애태우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오늘은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이다. 저기 한 무덩이 구름 몰려오는 곳에 그들의 그리움이 고여 있다. 그리고 눈물처럼 빗방울을 하냥 떨굴 것이다.

첫사랑과 포도사랑이 만나는 팔월이었으면 좋겠다.


김정배 기자 incheon@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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