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寸鐵活仁]人生萬事 塞翁之馬

2003.06.16 00:00:00

- 불탄 咸平 鄕校에 얽힌 揷話 몇가지


필자가 전남 咸平군청에 근무한 것은 麗順 반란사건 직후의 어수선한 때였다. 밤중에 자주 銃聲이 들리고 자고 새면 들판에 사람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을 때 25세의 어린 나이에 郡 계장으로 승진 발령돼 혼자 객지생활을 하니 不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때 가장 切實하고 필요한 것은 친구요, 술이었다. 본시 술에는 소질이 있는 나는 근무시간이 끝나기가 바쁘게 곧장 술집으로 직행을 했다. 날마다 거르지 않는 술집출입이니 반반한 고급집은 焉敢生心이고, 허름한 선술집 출입이 고작이었다.

군청에서 경찰서 앞을 지나, '윗청거리' 세든 집에 가는 도중 큰 길가에 어느 老婆가 하는 주막집 하나가 있었는데, 텁텁한 막걸리 맛이 좋고, 그집 딸이 淸楚한 美人이어서 시꺼멓게 연기에 그을린 天井 거미줄이 뒤엉킨 술청에 앉아 밤늦도록 탁주잔을 드는 일이 잦았다. 그때 잘 어울리는 술친구 중에 李彩甲(假名)이라는 부하직원 한사람이 있었는데 係도 같고 세들어 사는 집도 같고 心地도 맞아서 바늘과 실처럼 늘 붙어 다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咸平邑에서 다리 하나 건너 至近거리에 있는 鄕校마을(李庸燮 國稅廳長 出生마을)에 있는 향교가 地方共産폭도의 방화로 全燒되고, 그 主犯으로 李彩甲이 잡혀간 것이다.

그 당시 좌익으로 指目만 돼도 목숨은 없는 판이다. 適法한 訴追節次고 裁判이고가 애당초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신변에 극도의 不安과 現實的인 恐怖에 떨어야만 했다.

남이 보기에 兄弟간처럼 지낸 친구가 地方共匪의 首魁로서 향교에 불까지 질렀다니…. 만일 나에게 通匪의 혐의라도 씌워지면…. 자칫 매에 못이겨 나와도 관련이 됐다고 虛僞自白이라도 하는 날이면 萬事休矣, 내 一生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없이 세월은 가고 6·25동란 때의 일이다. 집만이 惡質地主 反動分子로 몰려 아버지는 갇히는 몸이 되고 나는 직장에서 쫓겨났다.

家産이 몰수되고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내몰리는 신세가 돼 있는 판에 咸平에서 기별이 왔다. 향교放火사건의 主犯으로 處刑된 李兄의 가족으로부터였다. 여기서 살기가 어려우면 나 혼자만이라도 그곳(咸平)으로 오라는 것. 자기들은 人共治下에서 대우를 받고 활동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신변보호를 해주겠다는 고마운 提議였다. 알아본 즉 李兄의 婦人은 郡女盟委員長을 지내고, 아들 영식군은 內務署員(경찰관)으로 있다는 것이다. 人共治下의 '살얼음판'에 아무리 자기의 죽은 남편과 아버지의 친구라 해도 反動分子로 내몰린 사람을 보살피겠다니….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만큼 李兄과 나의 交分이 그들 눈에 유별나고 살가웠던 것이다. 그러나 滿身瘡痍, 激浪에 까불리고 있는 가정을 팽개치고 나 혼자만 훌쩍 고향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아내를 먼저 보내서 그곳 사정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곧 돌아오기로 된 아내가 一週日만에 순 거지꼴이 돼 돌아왔다. 가는 도중 鶴僑面分駐所(지금의 지서)에 붙들려 그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郡 女盟委員長과 그 아들을 대고 그 곳을 찾아간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어린 놈이 郡廳 係長까지 지낸 反動가족이니 조사를 해 봐야 한다는 것.

그동안 李彩甲의 아들이 한번 다녀가고 남편이 반동분자가 아니고 오히려 同志的(?)이었다는 증언으로 간신히 풀려났다는 것이다.

'죽든 살든 여기 고향에서 사십시다' 아내와 나의 피맺힌 斷案이었다. 나는 여기서 人間운명의 妙理를 痛感한다. 내가 그때 咸平에 갔더라면 어찌 됐을까? 그때의 情況으로 봐 내가 살기 위해 附逆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反動가족이라는 弱點을 커버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부역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그리됐다면 나의 운명도 크게 변화해 어쩌면 生命도 부지 못했을 것이다.

人生萬事 塞翁之馬라, 인간세상의 吉凶禍福이 그처럼 無常하다는 것을 그때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肉體와 思考의 安易한 妥協도 안되며, 모름지기 지식과 경험과 思考를 고루 갖춘 지혜로운 삶만이 옳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아무튼 咸平땅은 인정많고 좋은 곳이었다. 샛파란 젊은 시절 2년 세월을 함평에서 지낸 그때 일이 60년이 다 되는 오늘에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天方地軸 물정모른 철없는 나를 친아우나 조카처럼 감싸주고 보살펴 주신 그 地方人士諸賢과 직장선배, 동료들의 따뜻한 온정을 잊을 수 없으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비축제'의 盛況과 국내  隋一의 모범 郡으로 지목된 것도 결코 偶然한 일은 아니다.


채흥기 기자 info@taxtimes.co.kr
- Copyrights ⓒ 디지털세정신문 & taxtime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발행처: (주)한국세정신문사 ㅣ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17안길 11 (서교동, 디.에스 빌딩 3층) 제호:한국세정신문 │ 등록번호: 서울,아00096 등록(발행)일:2005년 10월 28일 │ 발행인: 박화수 │ 편집인: 오상민 한국세정신문 전화: 02-338-3344 │ 팩스: 02-338-3343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화수 Copyright ⓒ 한국세정신문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