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 명퇴로 그 자리 갔는데" vs "이제 세무사'쯩'도 안 나와"
책임·부채론에 기댄 명퇴 관례…'세무사 무자격' 현실론에 힘 잃어
시뮬레이션 결과, 대안 없는 명퇴 폐지시 2년간 서기관 승진자 '無'
"지금껏 미뤄온 서기관급 이상 명예퇴직제 담론화 필요" 목소리
올해 상반기 국세청 고위공무원 인사가 지난 3일 발표됐으나, 명예퇴직 공석에 따른 승진 인사가 함께 맞물려 돌아가지 못함에 따라 상당 폭의 후속 인사를 남기고 있다.
이번 고공단 인사 마무리가 순연되는 요인으로는 고공단 후보 등에 대한 검증과정이 좀처럼 빠르게 진척되지 못한 것과 함께, 국세청 명퇴 관례를 벗어난 변수 등이 그 배경으로 꼽힌다.
국세청은 타 부처와 달리 세무서장급 이상 관리자에 대해선 60세 정년 2년을 앞둔 만 58세에 명예퇴직하는 인사 관행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국세청 명퇴 관례는 때론 가혹하리만치 엄격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만 58세를 기준으로 1~6월 이전 출생자는 상반기 명퇴를, 7~12월 출생자는 하반기 명퇴를 어김없이 준용해 왔다.
오히려 명퇴 연령을 한참 앞두고도 공직을 마무리하는 관리자들도 속출해, 지방청장 1년 재직 후 옷을 벗는 인사 관례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세무서장 또한 흔히 말하는 선호지 관서에 부임할 경우 명퇴 대상이 아니더라도 해당 임지에서 바로 공직을 마무리하고 있다.
국세청 명예퇴직이 이처럼 굳건하게 유지되는 핵심 동력은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책임론과 더불어, ‘나 또한 선배들의 명예 퇴임에 힘입어 지금 이 자리에 올랐다’는 부채론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하반기 과장급 인사에서 A세무서장, 이번 상반기 고공단 인사에서 B국장 등의 사례에서 최근 들어 국세청 명퇴 관례가 흔들리는 모양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진즉부터 예견됐으나, 역대 인사권자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고 사실상 후순위로 미뤄옴에 따라 문제를 키워온 측면이 적지 않다.
서장급 이상 관리자들에게 명퇴를 권유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책임론과 부채론보다 세무사 자격증이 더 근원적으로, 2001년 이후 공직에 임용(행시 44회)된 이들은 자동자격 대상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자동자격이 사라지는 순간 앞서 퇴직한 선배들처럼 세무사로서의 삶은 보장받지 못하기에 명퇴를 적잖이 고민하는 것은 당연지사로, 자동자격 혜택이 없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이같은 고민은 개인이 아닌 단체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작년 A과장에 이어 올해 B국장이 쏘아 올린 명예퇴직 거부가 후배들로부터 적잖은 파급력을 터뜨리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국세청 관리자들이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명퇴 관례는 세무사 자격 유무에 따라 명퇴냐, 아니냐, 갈림길에 서게 됨으로써 여기서부터 균열의 시작점으로 작용하게 됐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세정가 인사들 또한 복잡한 심경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선배들의 희생을 딛고 조기에 관리자의 길에 들어선 만큼, 후배들에게도 승진 길을 틔워주기 위해선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있는 반면, 선배들과 달리 공직을 떠나서도 세무사 간판을 달 수 없기에 최대한 공직에서 버텨야 한다는 현실론이 강하게 부딪히고 있다.
다만, 책임론과 현실론 등 상반된 얘기를 토로하는 국세청내 많은 공직자의 목소리가 접점되는 곳은 ‘질서 있는 명퇴제 폐지를 위한 공론화’다.
최근 국세청장을 역임한 이들의 퇴직 후 한결같은 얘기는 ‘시뮬레이션을 해 본 결과 지금 당장 명예퇴직을 폐지하면, 향후 2년 동안 서기관 승진 인사는 아예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입을 모은다.
만약 명퇴 폐지로 2년간 승진 인사를 할 수 없게 되면 인사권자 입장에선 고공단·부이사관·서기관·사무관 등 관리자 승진인사 전체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또한, 공직자의 가장 큰 희망이자 꿈이 ‘승진’인 점을 감안하면, 승진 인사를 하지 못할 경우 지휘권 확립이 어렵고, 복지부동 등 행정 추진이 더디게 진행될 우려가 다분하는 등 국세청 업무 동력이 꺼질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로, 명퇴 제도를 급작스레 폐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편으론, 국세청의 명퇴 폐지 또는 명퇴연령 연장은 공무원 정년연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공직 정년제도가 만 65세로 연장되는 법안이 통과되면 국세청 또한 자연스레 명퇴 폐지 또는 명퇴연령 연장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문제는 지금처럼 정년이 60세인 상황에서 명퇴를 폐지할 경우 서기관 승진자가 일정기간 단절될 수밖에 없고, 세무사 자격 부재를 이유로 명퇴 거부 사례가 속출할 경우엔 명퇴 관례가 형해화 됨에 따라 자칫 국세청 인사제도가 혼란에 휩싸일 위험이 다분하다.
결국, 정년연장 법제화만 기다리지 말고, 문제를 키워온 국세청 조직 차원에서 명퇴 관례에 대한 공론화를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으며, B국장 또한 자신이 아닌 후배들을 위해 이같은 행동에 나섰다는 해석도 분분하다.
다만, 인사제도가 여전히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혼란은 국세청에 있는 모두에게 상처로만 남을 뿐 해결책은 될 수 없기에, 스스로가 멍에를 짊어진 채 명퇴 관례 공론화라는 신호탄을 쏜 만큼 이제는 몸담았던 조직이 준비에 나서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세정가 인사들의 주문도 많다.
세정가 한 관계자는 “세무사 자동자격자가 줄어들수록 명예퇴직에 대한 회의론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명퇴 관행에 대한 공론화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만큼, 국세청은 이제라도 담론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공직에서 손해를 본 것이 밖에 나가보면 이득이 될 때가 많다”며, “그 누구도 쉽게 던지기 어려웠던 화두를 용기 있게 던진 만큼, 이제는 남겨진 이들이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여지를 주는 것도 한 방편”이라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