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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6.09.11. (금)

정운기의 '대한민국 관세의 선택'

중국·EU·ASEAN의 대응에서 한국의 길을 찾자

미국이 관세를 국가전략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무역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제 관세는 단순히 수입품에 세금을 매기는 제도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 생산했는지, 핵심 원료를 어디에서 조달했는지, 어떤 기업과 거래했는지까지 따지는 경제 안보의 수단이 되고 있다.

 

문제는 미국만 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과 유럽연합(EU), ASEAN도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이들의 대응반식은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관세 문제를 더 이상 관세만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은 ‘관세에는 관세’에서 자원·공급망 전략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과 가장 치열하게 충돌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미·중 통상 갈등 초기에는 양국이 서로 관세를 올리는 전형적인 보복관세 전쟁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대응 수단은 훨씬 다양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 등 전략물자의 수출통제다. 중국은 2025년 4월 일부 중·중희토류 관련 품목에 대해 수출통제를 시행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국가안보와 국제적 비확산 의무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국이 가진 전략적 자산이다. 중국은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 광물과 소재, 거대한 제조 기반과 시장을 통상정책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미국이 반도체와 첨단장비, 관세와 원산지 규정을 전략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중국은 희토류와 핵심 광물, 공급망과 시장을 활용한다. 결국 미·중 경쟁은 단순한 관세전쟁을 넘어 누가 더 강력한 공급망과 전략 자산을 확보하고 있느냐를 겨루는 경제 안보 경쟁으로 변하고 있다.

 

WTO 역시 이러한 충돌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2025년 미·중 관세 충돌이 격화됐을 당시 WTO는 양국 상품교역이 최대 80%까지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비 전망을 내놓았고, 세계 경제가 지정학적 블록으로 분열되면 장기적으로 세계 실질 GDP가 거의 7%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으로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미국은 우리의 핵심 수출시장이고 중국은 최대 수준의 교역 상대이자 제조업 공급망에서 빼놓기 어려운 국가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구조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의 대중국 전략은 ‘탈중국’이라는 구호보다 훨씬 정교해야 한다.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핵심 광물과 소재는 공급처를 다변화하되, 필요한 산업과 시장에서는 중국과의 교역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의존도를 줄이는 것과 관계를 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EU는 ‘규칙과 제도’로 맞선다.

미국이 2025년 철강·알루미늄 등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자 EU는 이에 상응하는 규모의 대응 조치를 준비했다. 당시 EU 집행위원회는 미국의 관세가 약 260억 유로 규모의 EU 수출에 영향을 미친다며 최대 260억 유로 규모의 미국산 제품을 대상으로 대응 조치를 추진했다. 동시에 협상의 문도 열어두었다.

 

EU의 특징은 대응 수단을 제도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적 강압 대응 수단(Anti-Coercion Instrument)’이다. 제3국이 무역이나 투자를 이용해 EU 또는 회원국의 정책 결정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면 EU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핵심은 실제 보복 자체보다 상대방이 경제적 강압을 쉽게 사용하지 못 하도록 억지력을 갖추는 데 있다.

 

EU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미국과 충돌하면서도 협상하고, 동시에 다른 국가·경제권과의 통상 네트워크를 확대한다. 2024년 말에는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 포괄적인 파트너십에 정치적으로 합의하고 이후 협정을 제도화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결국 EU의 전략은 명확하다. “미국과 협상하되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대응할 능력을 갖추되 규칙과 제도로 움직인다.” 그리고 “시장을 다변화한다.”

 

ASEAN은 보복보다 실리를 선택했다.

ASEAN 국가 중에는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수출국이 많다. 동시에 중국과의 교역과 투자 관계도 매우 깊다. 미·중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에서는 한국과 닮은 측면이 있다.

 

2025년 4월 ASEAN 경제 장관들은 미국의 일방적 관세 조치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보복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공동 입장을 밝혔다. 대신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을 선택했다.

 

ASEAN 정상들은 같은 해 5월 세계적인 무역 갈등과 공급망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역내 무역과 투자를 더욱 확대하고, ASEAN 상품무역 협정(ATIGA) 개선과 디지털경제프레임워크협정(DEFA) 등을 가속화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ASEAN의 전략은 외부 충격에는 협상으로 대응하고, 내부적으로는 시장통합을 강화하는 것이다.

강대국과 정면충돌하기보다 미국·중국·EU·일본·한국 등 여러 경제권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투자와 생산기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공급망을 중국 한 곳에 집중하지 않고 ‘China+1’ 전략을 추진하면서 ASEAN의 전략적 가치가 커진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전략은 달라도 방향은 같다.

중국과 EU, ASEAN의 대응방식은 서로 다르다. 중국은 핵심 광물과 제조 공급망을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한다. EU는 거대한 단일시장과 법·제도를 무기로 삼는다. ASEAN은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면서 역내 통합과 공급망 유치에 힘을 쏟는다.

 

그러나 세 지역의 전략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관세를 산업정책과 분리하지 않는다.

둘째, 공급망을 국가안보의 문제로 다룬다.

셋째,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려 한다.

넷째, 통상정책을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과 투자전략에 연결한다.

결국 세계는 이미 단순한 ‘관세정책’에서 ‘경제 안보 전략’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도 ‘관세정책’을 넘어 ‘관세 전략’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관세행정은 오랫동안 세수 확보와 통관, 밀수 단속, FTA 원산지 관리에 중심을 두어 왔다. 이러한 기능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 안보 시대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이제 관세정책과 관세행정은 산업과 공급망을 지키는 국가전략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

 

첫째, 경제 안보형 관세 정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수출입 신고자료에는 어느 기업이 어떤 물품을 어느 나라에서 들여오고 어디로 수출하는지에 관한 방대한 정보가 축적돼 있다. 이를 산업·공급망 정책과 연결하면 특정 국가에 대한 원료 의존도와 공급망 이상징후, 우회 수출입 가능성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다. 관세 데이터는 단순한 세관 행정자료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략정보다.

 

둘째, 원산지 관리를 국가 공급망 관리의 관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앞으로 주요국의 원산지 검증은 제품의 최종 생산국만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원재료와 부품의 생산국, 가공 공정, 공급기업까지 추적하는 방향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기업도 이제 ‘한국에서 만들었다’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디에서 원료를 조달했고 어떤 부품과 공정을 거쳤는지 설명하고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FTA의 숫자보다 실제 활용 능력을 높여야 한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많은 FTA를 체결한 국가다. 그러나 협정이 많다고 경제 안보가 자동으로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관세장벽이 높아질수록 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한다. ASEAN, EU, 중동, 중남미, 인도 등으로 수출시장을 넓히려면 FTA 원산지 규정과 현지 통관제도를 우리 기업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인력과 정보가 부족한 중소기업에 원산지 판정, 공급망 관리, 해외 통관 분쟁 대응을 지원하는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넷째, 산업·통상·관세정책을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연결해야 한다.

지금까지 산업정책, 통상정책, 관세와 통관은 각각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경제 안보 시대에는 이러한 칸막이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주요국이 관세와 수출통제, 투자규제, 보조금, 원산지 규정을 하나의 전략으로 연결하고 있다면 한국 역시 부처별 대응을 넘어 국가 차원의 통합전략을 가져야 한다.

 

한국에는 한국의 길이 필요하다. 한국은 강대국의 선택을 그대로 따라가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세계 경제가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단순한 구조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가운데 EU는 독자적인 경제 안보 체계를 강화하고, ASEAN과 인도 등 신흥경제권의 중요성도 커질 것이다.

 

한국의 선택지는 오히려 분명하다. 미국과의 경제 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중국과의 교역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동시에 ASEAN·EU·인도·중동·중남미로 시장과 공급망을 넓혀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미국이나 중국, EU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산업구조와 무역구조에 맞는 독자적인 관세·통상전략을 만드는 것이다.

 

관세가 국가전략이 된 시대에는 세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국경에서 세금을 걷고 통관을 관리하는 기관을 넘어 공급망의 위험을 조기에 감지하고,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며, 국가의 경제 안보를 지키는 기관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국은 자원과 공급망을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EU는 시장과 제도를 힘으로 만들며, ASEAN은 개방성과 실리를 경쟁력으로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무엇을 무기로 삼을 것인가.

그 답은 세계적 수준의 제조업과 촘촘한 FTA 네트워크, 방대한 무역·관세 데이터, 그리고 다양한 국가와 연결된 통상 네트워크를 하나의 전략으로 결합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필요하다. 모든 시장을 무조건 개방하는 것도, 모든 산업을 보호하는 것도 답이 될 수 없다. 지켜야 할 산업과 공급망은 전략적으로 보호하면서, 경쟁력 있는 분야와 시장은 과감하게 개방해야 한다.

 

세계가 관세를 전략으로 바꾸고 있다면, 대한민국도 관세를 국가전략으로 바꿔야 한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사이에서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적 개방과 전략적 보호’라는 한국형 제3의 길이다.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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