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트]서채규의 세정가 爐邊野談

2004.01.01 00:00:00

'승진 만끽' 사우나도중 급전받고 '탈락' 확인
본청장 "어떤놈이 날 기만했어" 재도약 결심


"누구 삐삐 임자 나와 보세요."
서울시내 P호텔 사우나에서 탕(湯)안을 향한 종업원의 외침을 듣는 순간, 중부청 국장 A씨는 얼른 타올을 걸치고 락카로 갔다. 자신의 호출기에 이미 서너번이나 호출된 흔적이 남아 있다. 사무실에서 호출이 온 것이다.

"국장님 빨리 들어오셔야겠는데요", "왜, 무슨 일 있어?", "예, 아까부터 본청 총무과장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주섬주섬 챙기고 난 A국장은 본청 총무과장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총무과장은 몇번이고 머뭇거리더니 "그게 뭐가 좀 어긋난 것 같습니다"하고 말을 흐렸다. 한마디로 미끄러졌다는 얘기다. 순간 맥이 탁 풀린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수고했다'는 말만 남긴 채 정처없이 걸었다.

80년대 중반 가을 어느 날. A국장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3급(부이사관) 승진의 꿈을 이룬 희열감으로 충만했다.(당시 중부청 직세, 간세, 징세조사국장 서기관 보직) 본청 총무과장으로부터 승진에 대한 '확실한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국세청에 2석의 부이사관 승진TO가 생겼는데 그중 한자리는 중부청 몫으로 이미 내정돼 있던 터였다. 그리고 승진후보 1순위로 A국장이 총무처에 올라간 것이다. 총무처에 1순위로 올라간 것은 사실상 승진이 확정된것이나 진배없는 것. 본청 총무과장도 그래서 자신있게 '승진통보'를 해줬던 것이다.

"나 해냈어" 한동안 유행했던 어느 프로권투선수의 "나 챔피언 먹었어"를 무색케할 정도로 부인에게 제일 먼저 기쁜 소식을 알린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우나를 찾았던 것. 그런데 조금전(오전)까지만해도 세상 모든 사물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던 희열이 지금은 싸늘한 좌절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공직세계의 또다른 냉혹성을 웅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국세청에서 4급에서 3급(부이사관)으로 승진하는 것은 비록 급수 하나의 차이지만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관문이었다. 다른 부처에 비해 국세청은 더욱 문이 좁았는데 그것은 청장이 외부에서 오는 경우가 많아 자체 승진 기회가 그만큼 적은 데다 '계급정년 시스템'이 안돼있어 인사 적체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복수직급제가 도입되기 전이라 이사관 자리는 뻔해 승진기회는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기'보다 더 힘들었다. A국장도 그 '바늘구멍'의 회한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었다. '2순위 들러리역'을 세번이나 했고, 이제 대망의 1순위로 올라갔는데 '소원 성취' 직전에 또 고배를 든 것이다.

창피하기도 하고 심한 좌절감 때문에 무력감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가족들 보기가 민망했다. 그는 사표를 결심했다. 결심이 여기에 미치자 배포가 커졌다. 청장에 대한 서운함이 오기(傲氣) 반 용기(勇氣) 반으로 작용해 마침내 그는 본청장을 면담하기까지 이르렀다.

A국장을 맞은 청장은 아무말이 없었다. 숨막히는 순간이 1∼2분쯤 계속됐다. "어떤 놈이 나를 기만했어."

청장의 말속에는 독기마저 느껴졌다. 순간 내심 원망도 좀 해볼 요량이었던 A국장은 사표의 사(辭)짜도 못 꺼내고 돌아섰다. 자신의 탈락이 청장의 의중이 아니고 외부의 '밀고 들어온 세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 A국장은 이제 '진짜 오기'가 발동했다. "언제고 이사관을 꼭 따고 말리라…." 보이지 않는 퇴진 압력 따위는 이제 그 '오기'가 극복의 버팀목이 됐다. A국장은 그로부터 1년2개월 뒤에 꿈을 이뤘고, 지방청장까지 역임했다.

이 일은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는 인사(人事)의 속설을 다시 한번 상기해 줬다. 또 '무조건 되고 봐야 한다'는 말이 인사시즌때면 더 실감나게 승진 후보자들의 가슴을 두둘겼다.

<本紙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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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채규 기자 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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