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청량리서장은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청백리(淸白吏) 서장 L씨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리로 가는 것을 기피했다.
덮어쓴 가발 바로 밑에 커다란 안경테,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힘없는 눈동자와 해맑은 얼굴, 신경질적인 인상, 자기(自己) 외에는 모두 도둑놈이란 표정으로 무시하는 태도, 깡마른 체구에서 나오는 염세적(厭世的)인 자세, 이런 모든 것이 합쳐진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소문난 서장이 청량리에 있었으니 그리로 내정됐던 사무관들이 눈이 확 뒤집혀 모든 것 죄다 동원해서 빠져버리고 대신에 나 같은 멍청이를 청백무대에 등장시켜 놓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우면서….
차라리 K과장이 미리 생색을 내지도 말고 가만히 있었으면 이렇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래서 인사(人事)는 발표될 때까지 내정된 사실을 당사자에게 미리 가르쳐 주지도 말고 극히 보안(保安)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인사를 부탁(付託)은 해도 청탁(請託)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인사에 있어 부탁과 청탁의 구별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즉, 조직의 내부자(內部者)에게 하는 것이 부탁이고, 조직 외부자(外部者)에게 하는 것을 청탁이라고….
외부자들은 조직 내부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소위 '무대포'식이 된다.
그러면 조직의 위계질서를 해쳐 일하는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 그래서 조직원이라면 청탁은 삼가야 한다고 본다.
인사권자가 알아서 할 일을 외부인을 시켜서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33년동안 그런 청탁은 내 양심을 걸고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병신아! 그러니까 당하고만 살지…."
"ㅉ ㅉ ㅉ"
어쩌랴? 발령이 났는데! 청량리로 가보자!
그분은 듣던 대로 전(全) 직원들을 엄청 불편하게 하셨다. 업무에 앞서 오로지 부조리, 정화, 절약, 이것만 집중적으로 신경을 썼다.
우선 먹는 것부터 얘기해 보자.
점심시간은 정말 괴로운 시간이다.
과장 모두 매일 점심시간에는 무조건 서장실에 집합을 시킨다. 그리고는 도시락을 싸오란다. 과장 모두 반대했다.
그러면 제일 값싼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둘 중 하나만 시키란다.
먹다 남은 찌개는 냄비째로 부속실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내일 점심때는 밥만 시키면 된다며 아주 엄청난 묘책(妙策)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도 먹고 살려니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참아야지….
서장실 부근은 언제 어느 때나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런 생활을 서장님이 다른 데로 가던지, 아니면 내가 가던지 헤어질 때까지 해야 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리고 정화결의(淨化決意)를 한다고 전 직원 집합이다.
총무, 부가, 재산, 소득, 법인 순으로 직원 앞에서 정화실천 방안을 발표하고 서약을 하란다.
"담배 끊어 절약해서 가족 먹여 살리겠다"는 과장이 있는가 하면 "술을 끊겠다", "걸어서 출퇴근하겠다", "돈 줘도 안 받는다" 하여튼 별의별 방안이 다 나왔다.
내 차례다.
"이건 양심의 문제입니다."
"총무과장! 에너지 절약을 위해 복도조명을 사람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만 하시오."
"그리고 각 과장! 출장관리부에 귀서시간과 출장결과를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하시오."
"나는, 지금까지, 지금도, 지금 이후에도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자리에 앉았다.
청백님께서 의지(意志)가 약하다며 다음주에 다시 발표하란다.
다음주에 우리는 그의 지시를 무시해 버렸다.
무얼 어쩌란 말인가?
나도 악만 남았는데!
다음은 아침 Tea Time 장면이다.
서장 지시다.
"총무과장! 에너지 절약을 위해 복도 조명을 사람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만 하시오."
"그리고 각 과장! 출장관리부에 귀서시간과 출장결과를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하시오."
과장들 모두 아무 말이 없다.
눈만 멀뚱멀뚱 시선 둘 곳을 찾는다.
"에∼ 그리고 경조사 부조는 서장 만원, 과장 오천원, 직원은 천에서 천오백원으로 하도록 합시다."
"가서 일하시오."
그게 끝이다.
어디가나 분위기 메이커인 나도 그만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다음은 그 분의 가정생활을 얘기해 보자.
그의 부인은 담석증에 걸려 수술도 하지 못한 채 몇개월을 방에 누워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석달후에 연말 보너스를 타면 수술한다고 계획을 세워 놓았단다.
보다 못해서 우리 과장들이 사모님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강제로 입원을 시켰더니 서장은 노발대발이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수술하면 무슨 소용입니까"하고 반쯤은 강제로 수술을 시켜드렸다.
"지금 돈이 없는데…."
"연말 보너스 타서 갚겠소."
그런 분이다.
멀쩡한 사람에게 청백리상을 안겨갖고 이렇게 버려놓았다.
가족들은 또 뭔 고생이람?
청백리 두번 했다가는 담석(膽石) 터져 죽는다.
물론 그분에게서 배울 점인지 안 배워도 될 점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봉투에 볼펜으로 주소를 적으면 혼쭐을 낸다.
연필로 쓰면 지우고 재활용을 할 수 있단다.
받은 연하장 속지를 떼어내고 다시 활용 한다든가 그런 것들을 하루종일 연구하고 있었다. 서장실에서.
이러자니 사무실 근무분위기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2년8개월을 교육원에서 고생한 놈을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게 하다니….
해도 해도 너무 심했다.
나를 시기(猜忌)하는 어느 분은 또 이렇게 말하며 씹어댈 것이 분명하다.
"박찬훈 저놈 빽 써서 청량리갔다"라 고.
44. 국장님 허벅다리를 꽉 잡고 늘어지다
L청백 서장은 특히 과장들을 못살게 굴었다.
정도 문제이지만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국세청의 업무는 달력에 따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다가오지 않는가? 아무리 청백이라 해도 할 일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까 그때가 '87년 1월초였던 것 같다.
면세사업자 수입금액 신고기간이었다.
지난 5월에 소득세 신고때 '서면신고제도(書面申告制度)'를 시행한 이래 이번 면세사업자 수입금액 신고도 일정수준이상 신고하면 서면신고로 종결토록 하라는 청(廳)의 지시이다.
지방청에서는 못내 불안해 H직세국장님이 L소득과장을 대동하고 일선(一線)서를 독려하러 나오셨다.
세무서를 동서(東西)로 나눠 우선 북부, 성북, 청량리, 도봉 등 동쪽지역 세무서 소득세과장들을 북부서로 모아 놓고 각 서별로 '수입금액 신고대책'에 대해 보고를 받으셨다.
앞의 몇개서 과장들이 모두 전년 대비 110∼120%를 하겠다고 보고하는데도 국장님은 무조건 화를 내셨다.
"내가 이런 보고를 받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좀 제대로 못 하겠어!"하시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버리셨다.
옆에 앉아 있던 지방청 L과장님이 황급히 따라 나가더니 다시 모시고 들어왔다. 국장님은 화가 덜 풀린듯 우리를 노려보며 마지못해 앉으셨다.
"다음! 청량리! 보고해 봐!"
'아이쿠! 된통 터지게 생겼구나! 나는 92% 밖에 안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국장님 옆자리로 가서 보고서를 펼쳤다.
"저희 청량리서는 전년 수입금액이 3천973명에 104조8억5천100만원이었습니다. 이번 신고 예상은 3천834명에 974억6천900만원으로 전년 대비 92.9%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
얼른 국장님의 눈치를 살피니 얼굴 색깔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또 한바탕 천둥이 칠 것만 같다.
"뭐?! 구십이 뿌로라고?!"
"이 친구 이거 정신 나갔나?"하시면서 또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신다.
나는 놓칠세라 무의식적으로 국장님의 왼쪽 허벅다리를 두손으로 꽉 잡아버렸다.
"국장님! 끝까지 들어보시고 가십시오"하면서 서 있는 국장님을 쳐다보면서 계속 보고를 드렸다.
"저희 청량리는 연초, 연탄 등 자료과세자가 94%입니다."
"발생자료에 좌우됩니다. 그래서 나머지 6%, 248명 전원을 서면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국장님은 잡힌 다리를 빠져나오려고 꿈틀 꿈틀하셨다.
나는 놓칠세라 더 힘을 줬다.
"이 다리 놔! 아퍼! 이 사람아!"
좀 풀어지신 것 같다. 손을 놓아도 나가실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잡은 손을 슬며시 놓았고 국장님은 마지못한듯 앉으신다.
"그래서 248명 전원을 서면으로 신고시키기 위해 이러한 '검토조서' 서식을 만들어서 1차는 계장이, 2차는 과장이, 3차는 최종적으로 서장님까지 권장하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이거야!"
국장님이 책상을 탁! 치시며 나를 처다 본다.
"어이! 거기! 이거 카피 떠와! 이 친구들 한장씩 나눠줘!"
그날 나는 92.9%로 통과했다.
사무실에 오니 과 직원들이 모두 반겨줬다.
나는 '업무노트'를 '82년도부터 국세청을 그만둘 때까지 모두 갖고 있다. 그래서 위에서 나온 숫자는 진짜로 사실이다.
45. 찍히고 또 찍히고
청량리에 온지 어언간 일년이 다되어가는 '87년 3월달이다.
청백서장님이 다른 데로 가고 '박○○' 서장님이 부임을 하셨다.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추운 겨울의 한기(寒氣) 때문에 피워 놓은 난로가에서 계장님들과 이번에 있을 사무관 인사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발대(開發隊) 출신으로 고참이신 '조○○' 계장님이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말했다.
"이번에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데로 가셔야지요."
"일년밖에 안됐는데요?"
"참 답답하네요. 일년 근무하면 됐지 또 무슨 고생을 하려고요?"
"아마도 좋은 데로 가실 겁니다"하면서 딱하다는듯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서, 다짐을 받듯이 확실한 충고를 해준다.
"만약 가더라도 지방청 소득2계장은 절대로 가면 안돼요. 거기가면 죽어요 죽어! 의사, 변호사! 골치 아파요! 고생 직싸게 합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또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왜냐하면 이동때마다 나는 찍혀만 다녔으니까.
그래도 나는 한구석 믿는 데가 있었다.
6급 시절 을지로에서 과장으로 모셨던 '안○○' 서장님이 이번에 서울청장님께서 박 과장이 많이 고생한 것을 아시고 꼭 배려를 해 주신다고 하셨다면서 전화로 알려줬기 때문이다.
나는 청장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87.3.11자 발령에 조계장님의 말대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서울지방국세청 소득세과 소득2주무 박○○' 정말로 눈이 확 뒤집혔다.
눈이 뒤집히는 주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지난주였다.
본청 조사국 전입자로 확정됐다고 본청의 K조사과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사국장님이 추천해 이미 본청장님의 싸인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변경은 절대 불가란다.
당시에 조사국장 '이○○'님은 내가 재무부에 근무할 때 국세청 징세과장으로 계셔서 업무협의 관계로 자주 뵙게 됐고 정화시범 교육때 대전에서 한달간 합숙을 했기 때문에 나를 잘 알고 계셨다.
첫째는, 교육원 약 3년, 청백서장님께 시집살이 1년, 그래서 다시 청으로 들어올 처지는 아직 아니라는 점, 둘째, 자형의 부도로 곤란한 처지와 수습을 위한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한 점, 셋째, 아직 본청에 들어올 군번(軍番)이 아니라는 점들을 말씀드렸으나 끄덕도 안하셨다.
나는 추천을 해주신데 감사를 드렸고 도저히 불가능하면 들어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국장님 방을 나왔는데 나중에 나의 사정을 들어 주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