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계장, 빽 한번 써봐" (50)

2007.05.18 09:24:56

창간 41주년 기념 기획연재 박찬훈(朴贊勳) 전 삼성세무서장

그분의 예상은 적중해 농지세 몇푼 내면 세금걱정이 없었고, 납품대금을 전매청에서 받으니 돈 떼일 염려 없고, 그 돈으로 인삼밭을 사니 자금출처 걱정 또한 없었으며, 인삼사업을 하다 보니 투기라는 혐의를 받지 않고 전국 어디서나 인삼밭을 실수요자로 인정받으며 구입할 수 있었다고 했답니다.

 

더욱 재미난 것은 인삼경작을 위해서는 삼밭을 구입한 후 1년은 거름주고 묵히고 난 다음 인삼씨를 뿌리고 6년을 키우게 됨에 따라 납품까지는 모두 7년이 걸린다.

 

헐값에 구입한 땅이 7년 뒤에는 몇배로 올라 있어 그야말로 일석오조의 사업을 하게 됐답니다.

 

이렇게 값 오른 땅을 지금까지 한평도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금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런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인삼도둑들이 극성이었다.

 

몇년을 애써 키워놓은 인삼을 야밤에 차떼기로 훔쳐가는 일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는데도 이 어른은 경비원 월급이 아까워서 지프차를 사서 흩어져 있는 삼밭을 이리저리 직접 순찰을 하고 다니셨답니다.

 

다시 궁리를 한 끝에 도둑을 맞지 않는 비결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강원도 철원 등지의 민통선 북방에 있는 야산(野山)을 사서 인삼을 키우면 군부대가 있는 지역이라 도둑 염려가 싹 없어졌답니다. 대신에 관리하기에는 무척 힘이 더 들었답니다.

 

평소에도 당뇨가 심해 고생을 하셨는데 순찰한다고 산에 올라가다 가시에 찔린 상처가 점점 도져서 결국 한쪽 발목을 절단하게 되고 다시 무릎까지….

 

나중에는 의족과 목발 신세를 지셨지만 사업에 대한 정열은 멈추시지를 않았습니다.

 

"자네 이번 일요일 날 뭐해? 산에 갈까?"

 

"아들 녀석이 아직 불안해. 자네가 아들노릇 대신 좀 해."

 

외동아들 '준영이'가 돈 아끼는 것은 자길 닮았다고 만족해 하셨으나 인간관계는 아직 멀었다면서 내가 좀 잘 가르쳐 보라셨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가 살고 있는 모양을 본 영감님은 "세무서 과장이 직원 집보다 못하다"면서 측은해 하셨다.

 

자린고비로 소문난 정 회장님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인사계 우리 사무실에 오셔서 우리 직원들에게 점심을 자주 사주셨다.

 

한번은 자기 친척이라면서 어떤 직원의 인사를 부탁하시기에 나는 "그런 말씀하시려면 다시 오지 마십시오"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조금은 미안했으나, 그 어른도 전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를 더욱 신뢰하시는 것 같았다.

 

그 날도 우리 직원들을 사무실 부근 밥집으로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주셨다.

 

"계장님, 일원동 아파트 계약하셨어요? 오늘이 마감인데요."

 

같이 신청했다가 낙첨돼 실망하던 우리 직원 '황○○'씨가 갑자기 묻는다.

 

나는 '91년도인가? 20 대 1의 경쟁을 뚫고 일원동에 있는 현대아파트 분양에서 당첨은 됐지만 계약금에다 채권액까지 무려 1억5천을 불과 일주일만에 내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라도 팔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주택정책을 비난하면서 계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회장님이 슬며시 그 돈을 주시면서 빨리 가서 계약을 하란다. 나는 우선 되갚을 자신이 없었고 이자 또한 큰 부담이라 거절했다.

 

"이 사람아!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이번 기회에 집 같은 집 장만해 봐! 나중에 팔면 갚아주면 되잖아."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었다. 점심을 먹고 있던 우리 직원들도 나와 똑같이 감사해 하였다.

 

그래서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 맞은편에 48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전에 살던 집이 팔리어 일부는 갚아드렸지만, 하여튼 그분은 나에 대해서는 각별하셨다.

 

점심 먹다 갑자기 아무런 담보도 차용증도 없이 그 큰 돈을 선뜻 내주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우리 직원과 함께 절감했다.

 

사실 그분이 나의 경제적인 구세주였다.

 

'81년도인가 자형의 사업실패로 인한 부도로 내가 그렇게 어려울 때 참으로 많이 도와주셨다.

 

"나중에 함 봐! 현대 정 회장, 삼성 이회장 등이 죽으면 나를 찾아오게 돼 있어! 명당자리 좀 달라고."

 

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내 친구 '이○○'를 가만히 불러 자금을 빌려주면서 목 좋은 땅을 사게 하고 그걸 되팔아 남은 차액으로 빚도 많이 갚아주셨다.

 

사실 나는 그분 때문에 계속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93년도에는 내가 예산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영감님은 거의 매주 내려오셨다.

 

"이제 좀 내려오시지 마십시오. 나도 일 좀 해야 되겠다"고 했더니 여기 오는 이유는 나를 만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명당자리를 사놓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당자리가 될 만한 곳이 여기 예산하고 청양지역이야. 토끼모양 지도를 보면 급소에 해당하는 자리가 바로 청양지역이지."

 

벌써 이 부근 여러 곳에 사두었다고 했다.

 

나는 "돌아가시면 10평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하니 "이 사람아! 자네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니까"하면서 답답한 표정을 지우셨다.

 

"나중에 함 봐! 현대 정 회장, 삼성 이회장 등이 죽으면 나를 찾아오게 돼 있어! 명당자리 좀 달라고."

 

그런 면에서는 일반인들과는 크게 다른 사고를 갖고 계셨다.

 

그런 그분도 IMF를 겨우 넘기고 한동안 자금압박에 고생을 너무 하신건가. '98년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나버리셨다.

 

아산병원 영결식에서 누군가 병원 현관 지붕위에 올라가서 트럼펫을 불었다. "내주를 가까이 하려 하니…"

 

정말 아들처럼, 자상한 아버지처럼 그렇게 지내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몹시 슬펐다.

 

장지(葬地)인 청원으로 가는 영구차 안에서 나는 사모님의 두 손을 꼭 쥐고 고인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사모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지금 살고 있는 저의 집을 살 때 회장님이 빌려주셨던 일부가 아직 갚지 못하고 좀 남아있습니다."

 

"알고 계십시오.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사모님은 "그 분이 없는데 뭐가 더 필요 하겠습니까"고 하셨다.

 

참으로 불쌍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먹을 것, 입을 것, 하고 싶은 것, 모든 것을 억제하시며 오로지 절제와 절약으로 일관하시다가 엄청난 부(富)만 유족들에게 남기시고는 빈 손으로 가버리셨다.

 

돌아가시기 6개월전에 사뒀다는 영감님이 묻힐 산소는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한눈에 봐도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산소를 평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뒷산의 이름이 그분의 이름과 같은 "상봉산"이었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가족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나는 괜히 참견하였다가는 오해를 받을까봐 안타까운 마음으로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더라면 진짜 아들처럼 효도 한번 해드릴텐데….

 

회장님, 영감님 편안히 계십시오.

 

<계속>

 



세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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