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계장, 빽 한번 써봐" (53)

2007.05.29 09:47:59

창간 41주년 기념 기획연재 박찬훈(朴贊勳) 전 삼성세무서장

58.  구미에서의 기선제압

 

구미로 가는 발령을 받았다.

 

예산에 온지 불과 석달 보름만인 '93년7월7일이다.

 

지방청에 들러 인사를 마치고 나니 총무과장님이 마중을 나와주셨다. 세무서 청사 입구에 들어서니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나게 넓은 앞마당, 시골 세무서라 하기에는 규모가 커 보이는 청사, 마치 외국의 어느 기관을 방문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취임식에서 '구미지역은 국가재건의 기틀을 다진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라는 자긍심과 국내 최대의 전자산업단지로서 국가경재 발전의 핵심적인 큰 몫을 하고 있는 지역적 자부심으로 세무행정 또한 거기에 걸맞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그것은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

 

세무서 청사 현관위에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대형 간판에 써서 걸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 합시다."

 

김천에 있는 지청장, 구미시장, 경찰서 등 각 기관과 방송사와 유력 일간지의 지국과 지역신문사 등 한군데도 빠짐없이 신고를 하고 나니 이삼일이 걸렸다. 이제 딱 한곳만 남았다.

 

나를 이제까지 수행하면서 안내를 하고 있던 행정계장이 "여기는 안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잘못하면 불알 잡힌다"라고 했다.

 

"…?"

 

얼마전에도 시청의 무슨 국장이 그걸 잡혀 터질 뻔 했다나.

 

나는 세상에 참 묘한 일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나도 한번 잡혀볼 각오로 그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4층 건물에 지하와 1층은 '일○○'라는 상호로 금은방을 차려놓았고, 2·3층에는 '○○신문사'라는 지역신문사를, 4층은 회장님 방으로 쓰고 있었다.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김○○ 회장은 풍체가 아주 좋아보였는데 오래전에 당한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좌절감도 크셨으리라.

 

나는 김 회장과는 뭔가 통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다행히 그걸 잡히지는 않았고 잘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나왔다.

 

엊그제 시장님과 경찰서장님에게 인사를 갔을 때 두분 모두 김 회장을 잘 좀 봐주라고 부탁을 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만나보니 이해가 됐다.

 

사무실에서 책상을 정리하고 각 과의 업무를 파악하고 있는데 이상한 서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세금 잘 봐 주겠다는 내용의 각서 한장이다. 세무서장이 김 회장에게 써준 것이었다.

 

'이건 또 뭐냐?'

 

나는 즉시 각 과장들을 서장실로 모이게 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기가 막힌다.

 

김 회장은 지역신문사도 경영하면서 본인이 장애자라 장애인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까 하여 그들을 고용해 직접 세공(細工)한 귀금속을 다른 곳보다는 비교적 저렴하게 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경쟁업자들이 '덤핑이다 불법이다'하면서 매일같이 세무서에 진정을 해 이로 인해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조사를 나간 우리 직원들에게 "어딜 함부로!"하면서 아마 좀 심하게 대한 것 같았다.

 

"꼭 사과할 의향이 있으면 내일 직접 세무서에 오셔서 이것을 쓸 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직접 사과하시고 돌려주시오."
"내일 10시에 기다리겠습니다."

 

부가세가 고지됐고 소득세도 이어서 고지하려는 시점(時點)에서 서장이 바뀐 것이다.

 

이임식을 하려는데 '날 잡아놓고 어딜 가?'하면서 서장의 그걸 잡으려고 세무서로 쳐들어 와서 일행들과 함께 서장실을 점거했다.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하는 수없이 그런 내용의 각서를 써주고 이임을 했는데 문제는 구미지역에 이런 소문이 퍼져 입방아를 찧게 되고 세무서 위신이 엉망이 된 것이다.

 

나는 이건 보통의 문제가 아니며, 공권력의 권위문제이며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납세자가 세무서 알기를 뭣같이 알아서야 어디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최선의 방법일가? 곰곰히 생각해 봤다. 나는 이 일을 조용하게 끝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반드시 김 회장의 사과를 우선 받아내고 고지된 세금을 한푼도 빠짐없이 받으면 실추된 체면이 조금이나마 회복될 것으로 봤다.

 

국세청에 근무하시다 구미시장을 지내고 다시 지난번 선거에서 경북도지사에 당선되신 '김○○' 선배님이 이 지역 출신이고 김 회장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사건 내용을 설명하고 토착비리 근절 차원에서 보고를 하겠다고 하니 펄쩍 뛴다.

 

자기가 잘 타이르겠다고 하면서.

 

그해 2월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여 대대적인 개혁과 부조리 근절을 추진했고 지금이 7월이니까 그러한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박 서장! 신체장애로 모든 행동이 좀 과격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하면서 알아듣도록 얘기를 해 놓겠다고 했다.

 

이번에 간 박 서장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난다며 자기도 청와대 들어올 때 박 서장의 힘이 컸었다고 했다나.

 

하하 거짓말이다.

 

며칠 뒤 나는 김 회장을 찾아갔다.

 

그는 차를 권하고 난 후 서랍을 열어 보관하고 있는 각서를 내놓으며 사과를 했다.

 

나는 김 회장님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김 회장님! 이것 받으러 내가 여기 온 것이 아니오."

 

"이 각서는 두 사람 사이의 사적(私的)인 일이 아닙니다."

 

"김 회장 대(對) 구미세무서, 국세청, 나아가 정부로부터 각서를 받은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공권력에 도전하는 것이요."

 

"꼭 사과할 의향이 있으면 내일 직접 세무서에 오셔서 이것을 쓸 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직접 사과하시고 돌려주시오."

 

"내일 10시에 기다리겠습니다."

 

<계속>

 

 

 



세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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