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시인, 통영서)
초록바람이 불어온다. 휘익 휘익 불어온 바람은 간들바람이 됐다가 갑자기 골바람으로 변하여 어디론가 몰려간다. 드문드문 들바람은 솜털구름을 몰고 고향 가는 길을 따르고, 이미 익을 대로 익은 6월의 햇살로 온 세상은 푸르게 푸르게 부풀어 간다. 차창밖 산에는 이제 온통 밤꽃세상, 차안까지 스며든 진한 밤꽃 향기에 취할 것 같다. 아니 바람난 수캐처럼 저 푸른 들판으로 달려나가고 싶다.
고향에서 불어오는 친구들의 향기는 또 그 무엇이랴, 그런데 어쩌나 지난 5월 신고업무로 무리한 탓인지 몸은 이미 몇일전부터 천근만근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 같다. 정말 이대로 깊은 잠속으로 빠지고 싶었다. 몇날몇일이고 꿈속에서 나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성을 만들어 쉬고 싶다.
부산에서는 열리는 전국적인 문학모임인 '문학의 즐거움' 행사를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고향으로 향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그래도 이번 행사는 무사히 끝내야 할 텐데…. 동창회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나선 고향 길, 토요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교통량도 많고 아직 완쾌되지 못한 몸 때문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아득하게 느껴진다.
먼저 행선지를 순천으로 향했다. 고향을 가다 지나치는 길이지만 또 기대감은 그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살면서 저마다 가슴속에 토끼풀 같은 풋사랑 하나 품고 산들 어떠랴, 제비꽃 향기 같은 그리움 하나 안고 살아간들, 잡힐듯 말듯 차마 다 꺼낼 수 없는 우정과 같은 그런 사랑 하나, 나에게 시가 되고 목마른 가슴에 샘물같은 마음의 안식처 하나 품고 산들 어떠랴, 뜨거운 심장같은 그것은 무엇일까
네명의 친구들과 반갑게 해후했다. 모두 몇번씩은 만남이 있는 친구들이라 벌써 우리는 30년전의 추억속으로 빠져간다. 같은 꿈을 꾸며 살아 왔고 결코 잊혀지지 않은 꿈을 간직한 친구들이 있어 좋았다. 우리네 삶이란 결국 꿈을 꾸기 위해 꿈을 갖기 위해 산다 했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또 앞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날들을 이야기하며 푸짐한 쌈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깊은 산사(山寺) 옆의 아늑한 음식점이라 그런지 산과 들에는 얼레지, 은방울꽃, 원추리, 하늘나리, 산국, 쇠비름, 질경이, 바랑이, 강아지풀, 마치 온 산과 들이 식물도감을 펼쳐놓은 것 같다.
다만 텅빈 머릿속은 오늘 전야제, 그리고 내일 본 행사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싶었지만 마음만 가득할 뿐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 그 절망감은 무엇때문일까.
오후 4시쯤 다음 날 고향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향한다. 먼저 저녁에 시간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아 고향집에 어머니를 뵙고 행사준비 사항을 점검해야 하는데 행사를 준비하는 요원들이 저녁 늦게 온다는 소식에 내일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중 아뿔싸 몇일전 병원에 갔다 저녁 늦게 끝나는 바람에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행사프로그램을 준비 요원들에게 보내지 못한 것이다.
행사 당일에야 안 일지만 프로그램만 짜놓고 예정된 진행자들과 사전 의견조율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 경과보고 모든 것이 뒤틀려 갈 것 같고 아무리 고향 친구들이지만 사전예고도 없이 행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작년의 경험을 들어 진행하려 했지만 모두 내 마음 같지 않으니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인가.
아니 어긋난 프로그램은 저녁 전야제부터 예견됐다. 식당의 음식준비부터 좀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점검하지 못한 내 탓이었으리라, 점점 더해지는 현기증으로 비몽사몽 상태에서 몸만 움직일 뿐이다.
선배가 운영하는 식당이라 하지만 음식준비 관계로 사전예약을 해야 하는데 저녁 9시가 되어도 고향준비요원은 감감 무소식이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구들의 식사문제가 계속 이렇다 저랬다 하는 바람에 몇번을 취소했다 다시 예약하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을 사전에 좀더 확실하게 해둬야 했는데 당초에 전야제 및 행사도 거창하게 하고 싶었다. 이왕 하는 것 친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행사를 하고 전야제는 오색 찬란한 촛불아래에서 노래도 부르고, 재미있는 이야기 마당, 시 낭송마당을 펼치며 우리만의 굿판을 벌리고 싶었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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