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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수준은 매 기간 변화한다. 이를 소득변동성이라고 한다. 소득변동성이 0이 아닌 이상 어떤 시점에서 소득수준이 낮아 빈곤가구로 분류됐다고 해서 반드시 다음기에도 빈곤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생애빈곤은 생애에 걸쳐 획득하는 소득을 현재가치로 환산해 합산한 금액이 생애에 걸쳐 필요한 최저생계비를 현재가치로 환산한 합보다 작은 경우로 정의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생애빈곤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평생을 두고 소득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필자가 최근에 연구한 바에 따르면, 생애빈곤의 여부는 거의 대부분 향후 8년이라는 기간안에 결정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지금부터 8년동안 평균적으로 빈곤가구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이후에 빈곤가구로 전락하더라도 그동안 축적한 저축 등을 바탕으로 미래의 빈곤에 대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반대로 향후 8년동안의 소득이 충분치 못해 장기빈곤에 속한 가구라면 그 이후에도 소득을 회복하기 어렵거나 회복하더라도 충분치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빈곤은 우리가 퇴치해야 할 사회·경제적 목표이다.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대부분 정부가 빈곤가구를 지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을 통해 빈곤가구를 보호·지원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급여는 빈곤가구를 대상으로 반대급부없이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빈곤가구라고 하여 처지가 모두 같지는 않다. 드물지만 주택, 부동산, 금융자산 등을 많이 보유한 자산가 중에서도 은퇴 등으로 인해 현재 소득이 낮은 가구가 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을 빈곤가구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빈곤가구 가운데에서도 자산 보유의 차이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빈곤가구 가운데 소득 변동성이 큰 경우에는 곧 빈곤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지만 그렇지 못한 가구는 생애빈곤화할 가능성이 높다.
빈곤가구 가운데에는 곧 빈곤에서 벗어나 충분히 안정된 생활을 되찾음으로써 미래시점에 이르러 지원받은 보조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상환할 수 있는 가구도 다수 존재한다. 이런 가구에 대해서는 굳이 상환의무가 없는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라 생활비 대부제도를 활용하면 빈곤정책으로서 충분하다. 반면에 생애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구는 지속적으로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만약 형편이 나은 가구에 대해 보조금제도를 생활비 대부제도로 전환한다면 그만큼 재정지출 소요를 절감할 수 있으므로 복지재정 안정화에 도움이 된다.
어떤 가구가 형편이 나은 가구인지 또는 생애가구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정보를 정책당국이 사전에 입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약 8년간 소득자료를 축적함으로써 생애빈곤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지금부터 소득정보를 축적한다면 현 시점에서의 빈곤가구가 생애빈곤가구인지를 8년후에는 판별할 수 있다. 만약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현재와 같은 반대급부 없는 시혜적 제도에서 8년 거치 상환제도로 전환하고, 대부금 상환의무를 지울 것인지의 여부를 8년후에 결정·시행한다면 빈곤정책 시행에 따른 재정압박 요인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런 개편은 복지제도의 근간을 뿌리채 바꾸는 혁신적인 개혁에 속한다. 물론 이런 개편에는 부작용도 따른다. 보조금 수혜자가 소득을 축소보고해 의도적으로 대부금 상환을 회피하려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만연할 수 있다. 지속적인 소득정보 축적관리를 위해서도 행정비용이 추가되고, 제도 개편에 대한 정치적인 저항도 예상된다.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소득포착률의 제고가 전제돼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점도 수반된다.
복지정책이 잘 정비된 서구 선진국에서조차 막대한 재정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복지정책을 이미 축소했거나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연금의 재정고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각종 복지정책의 재정안정성 확보문제가 멀지 않은 장래에 화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상태에서 조세제도를 개편하지 않더라도 국민부담이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세금인상을 통한 재정수입의 추가 확보는 더이상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재정안정화를 위해서는 세입보다는 세출 측면에서의 정비가 우선돼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위와 같은 방향으로 당장 전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상기의 방법을 응용해 재정 효율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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