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 달간의 세뇌교육
그렇게 해서 전국에서 불행하게도(?) 뽑힌 시범요원들은 단합 결의 겸 교육을 받기 위해 그 당시 대전에 있던 '세무공무원교육원'에 집결했다.
우리는 남대문(南大門)과 북부(北部)팀으로 나눠 배치를 받았고 이미 내정된 서장님, 과장님들과 합숙을 하며 한달을 보내게 됐다.
나는 북부팀의 부가가치세반에 소속돼 '이○○' 서장님과 '허○○' 부가과장님의 지휘아래 국세청의 세정 정화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도 했다.
한달동안 일본말로 소위 '히야시'가 된 우리는 내일이면 졸업을 하고 북부세무서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졸업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했다.
누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청장님의 지시라면서 세무서를 서로 바꾼단다. 즉 서장·과장은 그대로 두고 남대문 직원은 북부로, 북부에 배치된 직원은 남대문으로 가게 했다.
나는 그놈의 북부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달동안 정이 들었던 서장님, 과장님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 몹시 서운했다.
문제는 남대문에 와보니 한달간 교육을 같이 받았던 직원 몇 사람이 빠지고 교육도 받지 않은 다른 직원이 끼여 있다.
그때 빠진 직원이 소위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었다.
교육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저런 사람이 시범요원으로 뽑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던 그 친구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여기서 밝히면 안될 것 같다. 다만 그들 중 누군가 이 글을 읽어 볼 것에 대비해 이런 말은 해주고 싶다.
"그렇게 난리치면서 시범서를 만들었는데 정화의 탈을 뒤집어 쓰고 거기서 무슨 장난질로 무엇을 건지려고 시범요원으로 들어왔는가?"
"그리고 갑자기 북부로 가지 못하고 남대문으로 바뀌니까 별 볼일 없다 하여 빠져버리고 대신 교육도 받지 않은 엉뚱한 직원으로 바꿔 넣었느냐?"
참으로 한심한 것은 자기들 맘대로 국세청 인사를 떡 주무르듯 하고 있고, 또한 실지로 떡처럼 주무르고 있는 인사 담당자들이었다.
쓰벌넘 들! 너희들 때문에 이미 떡이 된 멍청한 우리들의 가슴에 또다른 멍이 든다.
만약 내가 인사(人事)분야의 일을 한다면, 이러한 파렴치한 인사는 반드시 근절시키겠다고 다짐했다.
29. 처음 주무되고, 20일만에 차석되다
나 자신에게 다짐한 대로 정도(正道)를 걷는 세무공무원이 되어 보자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면서 남대문세무서로 첫 출근을 했다.
갑자기 세무서가 바뀌다 보니 출근한 직원들은 어느 과로 가야 할지 몰라서 식당 겸 휴게실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총무과장 '김○○'씨가 오더니 인사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직전(直前)에 계장을 하던 사람만 남고 나머지 직원들은 나갔다가 오후 네시에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오후 네시, 사무실에 오니 '직원배치도'를 현관 입구 게시판에 붙혀 놓았는데, 나는 부가2계장이었고 모두 일곱명의 직원이 우리 계에 배치돼 있었다.
헉! 나이도 나보다 칠팔년이나 위인데다 6년전부터 계장을 하였으며, 여기에 오기 직전에는 지방에서 6급 과장을 지내신 대선배였다.
그런데 대전에서 교육받을 때 보니 한달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동료 직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이상하다 생각했던 분이 우리 계의 차석으로 와 있었다.
얼굴표정을 보면 어떨 땐 삶에 찌든 것 같고, 어떨 땐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지금은 명(命)을 달리하셨지만 그분이 바로 우리 계 차석 'S'씨이다.
말이 없던 그 차석님은 그날부터 '계장님, 계장님'하면서 친밀해지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20여일이 지났을까?
나를 아는 직장친구들 중에서 누구는 'S를 조심하라'하는가 하면, 또 누구는 '윗사람에게는 잘 한다'며 괜찮다고 하는데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행정계로 가서 그분의 '인사기록카드'를 확인해 봤다.
헉! 나이도 나보다 칠팔년이나 위인데다 6년전부터 계장을 했으며, 여기에 오기 직전에는 지방에서 6급 과장을 지내신 대선배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처음으로 계장자리에 앉혀 놓고 차석으로 나보다 훨씬 고참인 그를 보내 놓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과장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과장님, S씨는 저보다 대선배인데 어째서 차석으로 배치를 했습니까? 부득이 차석으로 한다면 2계보다는 1계로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아무리 말씀드려도 들을 기색도 없고 1계의 'J계장'도 막무가내다.
나는 며칠을 곰곰이 생각했다.
이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직접 서장님과 상의해 보겠다고 과장님과 S차석에게 사전 양해를 구했다.
그 당시 남대문서장님은 '정왕선'님이었다.
그분은 엄청난 독서량으로 박학다식해 모든 분야에 해박하셨으며 여유와 해학으로 인생을 멋있게 사시는 분이었다.
"누구시지요? 어떻게 오셨나요?"
아직 얼굴이 익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신문기자 아니면 납세자로 착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꾸벅 인사를 드리면서 말했다.
"이번에 부가2계장을 시켜주신 박○○입니다. 감사합니다."
"응 그래, 앉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당돌하게 말씀을 드렸다.
"서장님! 남대문이 시범세무서가 맞습니까?"
"응∼ 그렇지, 그런데?"
"정화시범하기 전에 인사를 먼저 시범적으로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제가 서장님이라면 인사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계장을 시켜 주신 것은 감사하나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많은 대선배(大先輩)를 차석으로 배치한 것은 도무지 사리(事理)에 맞는 처사가 아님을 강력하게 말씀드렸다.
서장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계셨다.
"저는 다른 직원은 통솔할 자신이 있습니다만, 그분은 제가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말을 이해하셨는지 서장님은 다른 과로 다시 배치를 해야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의사에 따라 처리하시는 것이 좋을듯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서장실을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