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납세의무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세금을 내려고 돈을 챙길 때면 짜증스러워진다. 요즘 말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그러다가도 자기가 내는 세금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납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짜증은 금방 사라지게 된다. 미국 국민들이 소득세를 신고하는 오뉴월에 사망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는 우연한 사실이 아니며 우리 납세환경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세법은 세금부담의 정당성과 납세절차의 합리성이 추구돼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과 취지를 반영한 법률이 국세기본법 제2장의 국세부과원칙과 세법적용원칙이며 그 가운데 가장 큰 의미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규정이 제14조의 실질과세원칙이다.
실질과세원칙이란 과세의 대상이 되는 소득, 수익, 재산, 행위 또는 거래의 귀속이 명의일 뿐이고 사실상 귀속되는 자가 따로 있을 때에는 사실상 귀속되는 자를 납세의무자로 하여 세법을 적용하고 세법 중 과세표준에 관한 규정은 소득, 수익, 재산, 행위 또는 거래의 명칭이나 형식에 불구하고 그 실질내용에 따라 적용한다는 내용이다.
이 원칙은 실정법(국세기본법)에 규정됨으로써 창설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니고 조세법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확인하고 선언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실질의 판단은 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조세가 경제적 부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제적 실질이 더욱 중시돼야 할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실질과세원칙은 모든 세법에 원천적으로 내재하는 기본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국세기본법 제3조는 실질과세원칙을 비롯한 국세부과원칙에 관해 세법에서 따로 규정을 두고 있는 경우에는 그 세법규정이 국세기본법보다 우선해 효력을 갖는다고 규정함으로써 국세기본법상의 국세부과원칙은 기본법으로서의 효력을 갖지 못하고 상위법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부가가치세법이다.
부가가치세법의 전면을 흐르고 있는 기본구조가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다. 즉 어떤 형식에 맞지 않으면 실질을 배제해 버려도 법의 존재형식은 합법성을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업자등록이 안된 사업자와의 거래라는 이유로 세액을 계산함에 있어 매입세액을 공제하지 않는 경우 또는 세금계산서가 교부되지 아니했거나 교부됐더라도 교부시기가 맞지 않다거나 기재사항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거래행위를 부인해 세액계산에 불이익을 가져오는 등 실질을 배제하는 규정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특히 세금계산서 교부라는 형식을 통해야만 거래의 합법성이 인정되고 정상적인 세액계산이 가능한 현행 부가가치세법은 세금계산서 발행이 한 달 지났다든지, 심지어는 하루 늦었기 때문에 매입자가 부담한 매입세액을 공제해 주지 않게 되면 그 매입세액은 국고에 두번 들어가는 이른바 이중과세의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신고·납부를 불성실하게 된 가산세도 부과된다.
더욱 불합리한 것은 세금계산서를 잘못 교부한 납세자는 그 잘못 교부한 데 대한 가산세만 부과되는데 반해 세금계산서를 교부받은 납세자는 매입세액공제도 못 받고 가산세도 물게 돼 과실이 더 적은 매입자가 더 큰 벌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불합리한 현상들이 생기는 것은 정부가 납세관리의 편의를 위해 납세의무자에게 세금계산서라는 과세자료를 만들어 제출하게 하고 그 자료의 철저한 관리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가산세를 부과함과 동시에 매입세액도 공제해 주지 않겠다는 규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금계산서의 교부 제출 의무는 납세의무자에게 국가가 협력을 구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가 납세자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거나 수수료를 보상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므로 부가가치세를 시행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협력의무를 지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이 아직도 납세자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의무 위반에 대한 지나친 가산세 부과와 함께 세금의 중복 부담까지 지우는 것은 지나친 행정편의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부가가치세는 실질과세를 배제하면서 법인세 등 소득계산을 할 때는 실질과세원칙을 적용하다 보면 동일한 매입액에 대해 부가가치세는 매입세액공제를 배제해 당해 세액을 부과하고 법인세는 매입의 실질을 존중해 손비로서 인정받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다.
부가가치세법의 시행 초기에는 빠른 시일에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욕심에서 납세자에게 과도한 협력의무를 부여하고 실질과세를 배제하는 법률을 제정했으나 시행 30년을 헤아리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실질과세원칙 등 국세부과원칙이 지켜질 수 있는 세법으로 정비할 필요가 절실하다. 납세자의 怨聲은 바로 이러한 데서 싹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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