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세제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새로이 등장한 부가가치세제
한국세정신문은 창간 58주년을 맞아 조세법학계 거목에게 세법⋅세정⋅세무에 대한 후일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대학 세무학과의 출범, 종합소득세제 및 부가가치세제 뒷얘기, 국립세무대학 출범과 폐지, 자료상, 세제발전심의위원회, 세무사시험제도, 상증세, 세무행정, 지방세, 변호사와 회계사·세무사 등 조세 역사 주요 사건에 얽힌 뒷얘기를 반추하며 세법·세정·세무에 대한 지향점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이에 우리나라 세무회계학 및 조세법학의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다한 송쌍종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로부터 '세법·세정·세무 분야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편집자 주> |
앞서 <6>에서는 일본이 우리 한반도를 지배하는 가운데 ‘조선소득세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개인기업이나 법인기업에 대하여 자기네 나라에서 시행한 것과 같은 내용의 소득세법으로 소득세를 과세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일본정부는 ‘조선사업세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였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는 일본에서와 동일한 사업세가 아니라 영업세라는 다른 이름의 세금을 과세하였다. 이들 두 가지 법의 공포 내용은 한반도만을 위한 세법을 따로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일본세법을 가져다가 우리나라에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영업세의 경우에는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해당 세금의 이름도 달리하였을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자국에서는 사업세라는 것을 지방세로 과세하면서 한반도에서는 영업세라는 것으로 이름을 바꾸어 국세로 과세한다는 방법이었으므로, 양자는 서로 조세체계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지금도 일본의 이 사업세는 여전히 지방세로 과세되고 있다. 이것을 과세하는 방법은 수입금액(회계용어로는 수익금액 또는 수익)에서 경비(회계용어로는 비용 또는 손비)를 뺀 나머지를 과세표준으로 하였으므로, 소득세나 법인세와 비슷한 내용체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순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적자기업에서는 사업세라는 지방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한반도에서만 시행하였던 영업세는 경비를 빼는 방법이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비과세가 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수익금액에서 경비를 빼는 과세방법을 이론상 소득과세(所得課稅)라 한다. 반대로 경비를 빼지 않고 수익금액을 그대로 과세표준으로 계산하는 과세방법을 외형과세(外形課稅)라 한다. 일본이 이처럼 영업세에 관하여 자기네의 사업세처럼 소득과세 형태로 과세하지 않고 외형과세의 방법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문헌을 통하여 그 이유를 찾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그렇게 한 이유를 가늠해 본 적이 있다. 즉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기업체들은 대부분 복식부기라는 기장체계를 채택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장부를 만드는 것이 예사이었으므로, 세무조사에서 모든 기업체의 경비항목을 실질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 정도로 전문인력을 투입하기도 여러 가지로 곤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의 상거래에 관하여는 적절히 동태를 파악함으로써 조선독립군으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을 봉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적은 수의 세무조사 인력으로 다수를 상대로 하는 손쉬운 방법의 외형과세를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그 후 1945.8.15. 광복을 맞이한 다음 3년만에 우리나라에는 이승만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4년만에 우리나라만을 위한 영업세법이 정식으로 제정·공포되었다(1949.8.13. 법률 제48호). 이러한 공포와 같은 날 시행된 영업세법에 따라 과세되는 영업세에 관하여는 판매업 제조업 은행업 보험업 운송법 등 31개에 이르는 업종에 관하여 그 판매금액이나 수입금액 또는 보험료액 등을 과세표준으로 하여 ⅰ)천분(千分)의 1 ⅱ)천분의 3 ⅲ)천분의 20 등 10여 가지의 천분율 세율이 각 영업별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영업세는 1977.7.1. 부가가치세법이 시행되기까지 줄곧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소득세 및 법인세와 더불어 3대 세법이라 불리웠다.
이상과 같은 영업세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점은 부가가치세가 1977.7.1. 과세되기 시작할 때까지 부가가치세의 예행연습을 한 셈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우연의 일치에 해당하지만, 부가가치세제의 실행을 앞두고 마치 알고서 그렇게 한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인 결과이었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과세기간에 관하여 법인의 경우에는 정관 등에서 정하는 사업연도 개시일로부터 6월간을 한 과세기간으로 정하였다. 만약 1년 사업연도인 경우에는 위 6월을 넘는 기간이 또다른 과세기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에는 달력에 따라 1~6월과 7~12월을 과세기간으로 정하였다. 다음으로 부가가치세의 사업자등록과 흡사하게 ‘영업감찰’이라는 것을 교부받도록 하였다. 또한 부가가치세의 거래징수와 비슷한 원천징수(법정원천징수와 지정원천징수)를 이행하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리고 한참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영업세의 신고서류 중의 하나로 현행 부가가치세법에서 요구하는 세금계산서와 흡사한 내용의 ‘표준계산서’라는 것을 제출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순조롭게 과세가 이루어져 왔던 영업세제를 버리고서 부가가치세제라는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제를 갑자기 도입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학계에서건 혹은 업계에서건 간에 부가가치세라는 세목을 거론하는 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의 세무학과에서 강의하고 있었으며,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일본 자료에 관심이 많았다. 그 결과 일본에서 간행된 단행본으로 부가가치세(일본식 표기로는 付加價値稅)를 소개하는 문헌을 광화문의 교보문고에서 세 가지나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67년 이후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부가가치세에 관하여 활발한 논의가 있었으며, 이미 입법까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문헌에서 부가가치세를 논의하는 글이나 단행본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짐작건대 일본에서 입법으로 거론되지 않았으므로, 일본어 세대에 해당하는 사계의 전문가들도 무관심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 않나 싶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난데없이 부가가치세제의 도입이 세제심의위원회에서 논의되었고, 결국 통과되기까지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세제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활발한 사전논의가 전혀 없는 가운데 입법화된 세제가 온전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부가가치세제의 도입과 관련하여 떠돌았던 소문 중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부가가치세제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하여 몇몇 인사들이 독일로 출장을 가게 된 연유이다. 그 주역은 최근까지 정치인으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김종인 박사(독일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경제학박사)이시다. 이 분은 초대 대법원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병로 옹의 친손자라고 한다. 김 옹은 1차 시험에서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된 손자에게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하도록 조언하셨다고 한다. 이 학과는 같은 학교에서도 커트라인은 매우 낮은 학과였는데도, 이렇게 조언한 까닭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자 한다. 그 조언으로 유학을 간 독일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김 박사는 서강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할 수 있었다. ‘신의 한수’라고 평가할 만한 조부님의 조언이었다.
이 분에게서 독일의 부가가치세제도에 관한 얘기를 들은 누군가가 청와대의 사무관에게 전언하였고, 그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당장 그 분을 모셔오라고 명령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야심찬 중화학공업의 발전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을 기획하는 중이었으므로, 세수증대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였다. 독일 부가가치세제도가 새로운 세수증대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박 대통령은 김 박사를 모시고서 즉시로 독일을 방문하는 조사단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별다른 잡음도 없이 영업세제도에서 곧장 부가가치세제도의 도입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미 1971년의 세제심의위원회에서 종합소득세제의 도입과 부가가치세제의 도입을 함께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앞것은 1975.1.1.에 계획대로 실현되었지만, 뒷것은 2년 반이나 늦은 1977.7.1.에 실현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는 앞서 게재된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대로 번안하기만 하여도 법안이 만들어질 수 있는 일본법의 모델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일본에서는 1988.12.30.자로 ‘소비세법(消費稅法)’이라는 이름의 부가가치세제를 공포·시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1977.7.1.보다 무려 11년 반이나 늦은 일이었다. 또다른 이유의 하나는 그 당시 재무부 세제국의 입법담당 직원이 30명 정도에 이르렀는데, 대학의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한 인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법조문을 잘 다루는 법학도가 없는 가운데 원활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인재를 구하여 일을 맡기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부가가치세제가 1977년 하반기부터 도입되었지만, 박정희 정부에서는 부가가치세제를 둘러싼 잡음이 일게 되었다. 새로운 세제로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만한 것이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부작용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을 펼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에 관하여 요약된 인터넷 기사를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위키백과 박정희 중 박정희란 ‘제4공화국’ 검색)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