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계장, 빽 한번 써봐"(1)

2006.11.02 14:48:02

창간 41주년 기념 기획연재<1>박찬훈(朴贊勳) 전 삼성세무서장

우리나라 세정현대사는 굴곡과 변혁의 역사다. 본지는 창간 41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으로 박찬훈(朴贊勳) 전 삼성세무서장을 통해 그 굴곡과 변혁의 소용돌이 속의 세정현장을 들여다보는 '세정 타임머신'을 마련했다.

 

과거는 내일의 자산이라 했다. 이 연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다. 특히 열악한 근대 세정사의 현장을 간접체험함으로서, 납세자에게는 세금의 소중함을, 세무공무원에게는 국가공복으로서의 좌표를 일깨워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기획연재는 박찬훈 전 서장이 국세청 최말단직원으로 출발해서 '국세청의 꽃'이라는 서기관까지 승진하고, 명예퇴임 때까지의 공직생활과 주변일상을 유머를 담아 기술하게 될 것이다.

 

국세청 근무시절 진솔한 성품과 걸출한 업무처리능력 등으로 인해 상하의 신임이 두터웠던 박찬훈 씨는 '혹시 조직에 누가 되지 않을까'를 염려하면서 연재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연재의 '당위성'을 내세운 오랜 설득 끝에 결심을 받았다. 다만 어떤 사건 등과 관련된 부분은 개인의 명예나 조직에 누를 끼칠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점을 공지해 줄 것과 부분적인 익명처리를 전제했다. 본 연재는 매주 월요일자에 게재된다.

 

<편집자 주>

 

 

 

<프롤로그 (Prologue)>

 

"거짓과 변명아닌 '진실'을 쓰렵니다"

 

한국세정신문 서채규 편집주간님으로부터 국세청 근무시절 이야기를 연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과연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까? 

 

그의 제의(提議)는 마치 저에게 더 늦기 전에 네 인생의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라는 명령같이 들렸다. 

 

'맞어! 돌이켜 볼 때도 되었어.'

 

금방이라도 소낙비가 쏟아질 것 같은 8월 하늘을 한참동안 멍청히 바라보며 새삼 나 자신을 생각해 봤습니다.

 

저를 보고 누구는 형편이 없는 놈이라 하고, 또 그냥 쓸만한 놈이라 하는가 하면, 또 누구는 진솔한 놈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도 저를 심판할 수 있도록 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된다는 여지가 조금은 있는 것 같고….

 

하여튼, 저도 제 자신(自身)을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내가 누구일까? 

 

진정 어떤 녀석 일까?

 

내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저는, 이 문제를 죽을 때까지도 해답을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생을 연구하는 철학자(哲學者)도 아니고 제 자신을 알기 위한 어떤 사색이나 참선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는 말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양심(良心)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라고.

 

 

 

“이제 한번 써보겠습니다. 변명(辨明)과 거짓이 아니라 진실(眞實)을 쓰겠습니다.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제가 했던 말, 제가 한 행동, 그리고 제가 느꼈던 것을 가급적 여과(濾過)없이 여기에 전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근무했던 국세청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며, 행동했던 지난 날들의 이야기를 감히 써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제 벌써 회갑(回甲)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나온 과거를 어디 한번 돌이켜 보는 것도 그리 무의미(無意味)하지 않다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서 자신없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 

 

우선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격려해 주신다는 믿음아래 용기를 내어봅니다.

 

무슨 커다란 인생철학(人生哲學)이 저에게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기억될만한 업적(業績) 하나 없는 녀석이 주제넘게 지난 날의 이야기를 하려니 그게 정말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저 자신의 반성문(反省文)으로 봐주십시오. 

 

돌이켜 보면,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자리에는 제가 거기에 있었으며, 소위 핵심(核心)이라는 곳은 항상 비켜 서 있었습니다.  제 능력(能力) 탓이겠지요.

 

아무리 한직(閒職)에 있더라도 어딜 보내달라는 소리 한번 해본 적이 없이 그냥 보내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비록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자리라고 해도 해야할 일이 거기에 있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누군가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제가 거기에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웃으면서 일하려고 열심히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저를 보고 잘나가는 놈이라 하더군요. 저는 그 말이 정말로 듣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내가 겪은 직장생활 전체를 조명해 보니 참으로 제 자신이 한심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으며 소위 말하는 청탁 한번 못해보고 오직 저 자신의 빽만 믿고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국세행정의 작은, 아주 작은 밑거름이 됐다고나 할까요?

 

누군가 '성공하면 자리가 커지고 실패하면 사람이 커진다'고 했습니다.  제가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 여러분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번 써보겠습니다. 변명(辨明)과 거짓이 아니라 진실(眞實)을 쓰겠습니다.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제가 했던 말, 제가 한 행동, 그리고 제가 느꼈던 것을 가급적 여과(濾過)없이 여기에 전하겠습니다.

 

저를 제대로 파악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고, 또한 근무하시는 동안 조그만한 참고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딱딱한 업무 이야기보다는 바쁜 일과시간 중간 중간에 '씨익!' 그냥 한번 웃을 수 있도록 가급적 '에피소드(Episode)' 위주로 써 보겠습니다.

 

 

 

'67. 7. 1 세무공무원  첫출발

 

'67년7월1일.  이 날은 내가 세무공무원으로서 첫발을 디딘 날이다.  첫출발은 중학시절 정들었던 시골도시 안동(安東)에서 시작됐다.  같이 발령을 받은 고교 동기생 '영성'이와 함께 이불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야간열차를 이용해 대구를 출발해 안동역에 내리니 당장 오늘밤 잠자리가 문제였다.

 

"하숙집을 정해야 되는데…."

 

"오늘은 그냥 아무 데서나 자고 내일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부탁해 보자."

 

둘이서 이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아줌마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하숙방이 있단다. 

 

얼씨구 일이 수월하게 풀리려니 저절로 해결이 되는구나! 깨끗한 방도 많고 끝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여 놓칠 새라 아주머니 뒤를 바짝 붙어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신이 나서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한달 하숙비를 지불하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7월1일 똑같이 조사과로 배치를 받은 두 녀석에게 특히 시집 못간 처녀 직원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다투어 하숙집을 구해 준단다.

 

'걱정하지들 마시라! 우린 벌써 하숙집에서 자고 출근했다.'

 

 

 

“하숙집 동네가 어디냐고 하길래 안동역전 부근이라고 가르쳐 줬더니 모두들 얼굴색이 변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숙집 동네가 어디냐고 하길래 안동역전 부근이라고 가르쳐 줬더니 모두들 얼굴색이 변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기차역 부근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지저분한 홍등가였다.  ㅎㅎㅎ 그렇고 보니 철딱서니 없는 두놈이 하숙집을 홍등가 한복판에 자리잡아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 하숙친다고 우리를 속인 아줌마는 그 일대에서 알아주는 '왕포주'였다.  그날 우리는 늦은 밤에 돌아와 주인아줌마에게 제법 인상을 쓰면서 항의했다.

 

"아줌마! 하숙비 돌려주세요!"

 

"이런 데서 무슨 하숙을 친다고 그래요?!"

 

우리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줌마는 "c8! 머스마 자식들이 암 데서나 그냥 있어!"

 

"내가 신경 많이 써줄 테니까! 한달 그냥 참어!"

 

우리 둘은 다시 대들었다가는 그냥 두들겨 맞을 것만 같아 찍소리도 못한 채 한달 하숙생활을 홍등가 중심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출근할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퇴근 때에는 하숙방까지 도착하기란 엄청 힘이 들었다. 마치 미식축구에서 공들고 있는 놈이 요리조리 피하면서 돌진하듯이.

 

"우리 하숙집이 바로 여기예요!!" 하는 말에 슬며시 팔짱을 끼던 아가씨들의 실망과 허탈이 섞인 음성이 금방 튀어 나온다.

 

“병신들! 웃기고 자빠졌네!"

 

우리는 다른 곳으로 하숙집을 옮길 때까지 거의 한 달을 이런 욕을 꽤 많이 들으며 애먹고 살았다. 첫 시작부터 O B가 나버렸다.

 

'멀리건 안주나?'  첫 타석인데.

 

 <다음 월요일자에 계속>

 

 

 

[프로필]학비 보태려 국세청 취직했다가 그만…

 

저는 45여년동안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아버님과 시골마을 경북 영주에서 시집오신 어머님 슬하에 딸 넷, 아들 셋, 7남매 가운데 누님 아래 첫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을 따라 초등학교는 이곳저곳 여러차례 옮겨 다녔으며, '안동사범병설중학교'와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상학과'를 '69년 2월에 졸업했습니다. 뒤늦게 '99년 8월에는 '홍익대학교 세무대학원'을 수료했습니다.

 

대학 3학년 2학기가 접어들 무렵,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학교를 야간부로 옮기고 학비(學費) 좀 보태려 국세청에 들어온 것이 평생직장이 돼버렸던 것입니다.

 

'67년7월1일자로 조건부 사세서기보(9급)로 안동세무서에서 출발하여 2000년7월31일자로 삼성세무서 서장을 끝으로 그만뒀습니다. 정확히 33년1개월동안입니다.

 

그동안 안동·북대구·서대구·성북·도봉·청량리세무서를 거쳐 재무부 세제국에도 근무했습니다. 그후 '부가가치세'가 시행되기 한달전인 '77년6월1일자로 을지로세무서에, 그리고 '정화시범서'였던 남대문세무서를 거쳐 중부·성동세무서에서 9·8·7·6급 시절을 보냈습니다.

 

'83년 8월에 사무관이 된 후, 세무공무원교육원 교관, 청량리 소득, 서울 청 소득2계장, 반포 법인세과장, 본청 인사계장으로 근무했습니다.

 

'93년 2월에 서기관으로 승진하여 예산·구미·천안서장에서 다시 서울청 소득세과장, 그리고 서초세무서장을 거쳐 본청 납세지도과장으로 들어가서 정말로 뭐 빠지게 일 한번 해보고 홍보과장을 거쳐 삼성서장을 끝으로 국세청을 나왔습니다.

 

2001년도초에 서초동에서 'ACE세무회계사무소'라는 상호로 세무사를 개업하고 지금까지 일도 하고, 낚시도 하며, 가끔씩 골프도 치면서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현직(現職)에 있을 때의 경직과 구속, 이런 것 훌훌 털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가급적 그런 거 다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국세청과 퇴직하신 선배님과 현직에 계시는 후배님들을 정말로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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