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아내의 손

2006.05.15 00:00:00

정기선(금천서)


'우리 부부는 저녁에 잠잘 때만 되면 거의 예외없이 치러내야 하는 행사가 하나 있다. 두 아들녀석 등을 긁어 주는 일. 한 삼사년 정도 계속됐을 것이다. 요란스럽던 아이들을 어찌어찌 진정시켜 잠자리에 뉘어 놓고 겨우 한숨돌릴 즈음 되면, 어김없이 "등 가려워" 혹은 "등 긁어 줘"(요즘은 "등 긁어 주세요"로 진전됨)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지금이야 체념했다지만 낸들 그런 일이 처음부터 고깝게 여겨졌던 건 아니다. 게다가 이제 애들에게 그런 일을 시켜야 할 나이가 다된 판에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아이들을 군소리없이 잠재우려면 달리 방법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실은 그런 일일랑은 지금까지 애들엄마,즉 아내가 혼자서 대부분 감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선지 아들 녀석들은 어쩌다가 내가 긁어 줄라치면 자기들끼리 종종 이런 말을 지껄인다.

"에이 아빠는 맨날 아프게 긁어, 엄마는 안 아프게 긁어주는데 그치 윤호야."

형이 이렇게 말하면 동생도 맞장구친다.

"응, 그래. 엄마는 정말정말 시원하게 긁어주는데…"라면서 자기 딴에는 무척 애처로운 어투로 제법 코맹맹이 소리씩이나 내가며 서운함을 표시하곤 한다. 그럼 나는 "이노무 자식들이 무슨 잔소리가 많어"하면서 오히려 더 박박 긁어주고는 아이들의 작은 비명을 유발시키곤 하는 것이다.

한번은 어느 날 저녁 워낙 애들이 그런 소리를 자주 하기에 그럼 얼마나 시원한지 보자며 아내에게 내 등을 긁어 달라고 부탁해 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과연 손으로 스윽 훑고 지나가기만 했는데도 등은 물론이고 전신이 시원해지는 것 아닌가.

"아니 정말이네…. 정말 시원하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금새 가려움 같은 것이 없어지는지라 희한한 듯 웃으며 돌아 앉아 아내의 손을 살펴봤다. 무표정하게 맡겨진 아내의 손은 눈에 띄게 까칠했다, 아니 까끌까끌했다. 이에 비해 전혀 까칠하지 않은 내 손이 아내의 손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휴, 아이들이 엄마손을 더 원하는 이유가 이렇게 따로 있었구만 그래. 그나저나 그대 손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하고 묻다가 나는 대번에 목이 메어왔다. 아내손이 처음부터 그랬을 리 없지 않은가.

아내는 처녀시절 나와 손을 잡고 걷거나 마주 잡는 걸 꺼려하는 편이었다. 원래가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품인 탓도 있지만 내 손과 비교되는 것도 그리 달갑잖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내의 손은 일 잘하고 부지런하다는 또순이 스타일이었고 나는 게으른 선비 스타일로서 숫제 '이건 여자 아니냐'는 놀림을 듣기 딱 맞는 손이었다. 실은 나도 그 당시 아내에게 무슨 남자 손이 이러냐는 핀잔까지 심심찮게 듣던 터여서 남자의 자존심으로서도 아내와 손을 마주 잡는 일이 그리 수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알까, 아무리 비교될지언정 내 눈에 통통하고 귀엽게만 보이던 그 손을 마냥 꼭 붙들고 싶던 그 때를.

이제 20년도 더 지나 버린, 서로 처음 얼굴을 대면하던 그때, 나는 떨림으로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대신 내 눈길은 그녀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 어느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 순간 얼핏 바라본 그녀의 앙증맞던 그 손. 가방을 앞으로 하여 두 손으로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엔 공부하다 실수로 그어진 듯한 볼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었다. 아, 나는 당장 그 볼펜 자국을 내손으로 호호 불며 지워주고 싶었지만 소심하기만한 나는 차마 말은 못하고 냉가슴만 앓았었다.

이듬해 겨울, 그 때가 아마 내 생일이었을 것이다. 아직껏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주로 심심하게 걷는 것으로서만 데이트를 나누던 우리는 각자 집으로 발길을 돌릴 때가 되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지려다 슬몃, 아내가 먼저였던가, 우리 악수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인가. 그녀의 다소곳이 내민 손을 나는 서슴없이 두손으로 싸잡아 악수하며 한동안을 놓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손을 언제까지라도 함께 잡고 걸으며 그녀의 모든 미래를 책임져 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훗날 아내가 말하기를 그 때의 나는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했었다고 했지만 어쨌든.

결혼후, 이제 아내와 손을 떨림으로 마주잡는 일은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간혹 폼을 잡아보지만 아내에게는 식상함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혹여 다시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것이 주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돼 버렸다.

세월의 힘이란 그런 것인가. 엊그제 잡아 본 아내의 손에서는 그 순간 어느 가수의 노래를 떠올려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있잖은가, 그 노래.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그 노래가 뜨던 시절엔 전혀 관심 밖일 뿐더러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던 노래가 이제 와서 어찌 그리도 심금을 울리는지 모른다. 한번 정식으로 배워서 아내 앞에서 열창해 보이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요즘엔 그 노래를 한번 폼 나는 곳에서 제대로 불러볼 요량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 거칠어지고 딱딱해진 아내 손에 트임 방지 손크림 부터 먼저 발라줄 일이다. 솔선수범 도와줄 일이라도 찾으며 아직도 샌님 같기 만한 내 손이 더 먼저 거칠어져야 할 일이다. 훗날 애들에게 부끄러운 아비 손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상민 기자 osm115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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