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누룽지를 끓이며-문전안(속초서)

2006.06.12 00:00:00


상냥하고 세련돼서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가 좋다. 나는 여느 이웃여자들의 비슷한 처지에 오가는 잡다한 수다와 타인들 신변얘기 따위를 별로 좋아 하지 않기에 그녀에게도 처음에는 좀 경계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삶의 모습들이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뭔가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게 현실이므로, 온갖 상상에 저들끼리 쑤근대다가도 지나가는 내 앞에선 자신들의 푸짐한 입방아를 무마하듯 가식적이고 과장된 인사를 건네는 이웃여자들에 어지간히 질려버린 탓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낯가리는 성격인 나는 마음과는 달리 더욱이 먼저 다가가 사귀는 편이 못된다. 원래부터 그랬다.

학창시절부터 활달한 아이들처럼 많은 벗들을 사귀며 돌아다니지 못했고 그렇지만 손으로 꼽을 만큼의 친구들과 일단 가까워지면 깊은 정을 나눴다. 서로 뿌듯한 정을 느꼈음에도 이제는 끈을 놓아버린 몇몇 인연도 있지만 대개 나와 닿아 친밀해진 사람들과는 지금도 꾸준한 신뢰감으로 지내오는 편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관계속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애착을 가졌던 듯 싶다.

처음에는 은근히 호기심을 드러내던 그녀는 서로 먹거리를 나누고 놀러오는 아이들을 먹여 보내면서 신뢰를 느꼈는지 말수 적은 나에게 늘 상냥하면서도 그러나 지나친 관심으로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서로 적절한 거리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종교거나 육아거나 취미 따위로 자잘한 웃음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주말의 나른한 오후가 나도 점점 정겹다.

이웃과의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비록 내 일상에 커다란 평화를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삶에 꼭 있어야할 미네랄 같은 것은 아닐까.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 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온다는 걸 나는 겪어 왔다. 살아가다 보면, 그게 세상에 대한 욕망이든, 오만이든 자부심이든 때론 취미까지도 어느 한가지에 완전히 몰입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냉혹함을 보게 되는데 자기가 두른 영역을 꽉 움켜쥔 채 앞만 보고 가다 보니 조급해져서는 다른 이들이 그 발에 걸려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때론 보고도 아랑곳 하지 않아 저러다 어쩌려는지 그 집요함이 오히려 내가 걱정될 때가 있다.

길가에 무슨 꽃이 피어 있고, 볼에 닿는 바람은 어떠하며 누가 내 발에 넘어져 아파하는지 그리고 또 어떤 이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지 좀 살펴보며 걸었으면 좋겠다.

삶의 순간순간, 걷는 여정 하나하나가 아깝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 빠른 성취 위에 서서 대단한 희열을 맛 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내내 아늑할 수 있을지 아무래도 난 의심스럽다. 내게 더 풍부한 삶이란,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한 아름 껴안듯이 세상을 품으며 사람들의 체온으로 내 가슴을 데우며 사는 일이다.

갈수록 나는 사람이 좋다. 그래선지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아이의 엄마이면서도 마음 맞는 동료들과의 저녁 술자리는 거의 마다하지 않는데, 바쁜 업무에서 벗어나 조금씩 가슴을 열어둔 채 술 한잔 건네다 보면, 분주한 사무실에서 생겨나는 사소한 오해나 불만이나 작은 생채기 같은 것들이 누그러지기나 회복되기도 하거니와 사람 사이에 오가는 잔잔한 정과 여유로 인해 마음이 푸근해진다.

물론 아이와 함께 홀로 살아가는 쓸쓸한 존재이니, 동반자와의 내밀한 유대감없는 삶에서 오는 외로운 욕구이기도 하지만 그런 만남으로 다양한 타인들과의 관계가 더욱 풍부한 것이 된다면 그만큼 가치있는 것일 테다. "당신들은 다 나의 먹이감입니다. 그러니 몸조심들 하셔요." 왁자한 저녁 자리에서 같잖은 글 몇편 보인 걸로 작가라 추어주는 한 동료의 한마디에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보는 것도 재미있으니 말이다.


권종일 기자 page@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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