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누룽지를 끓이며(下)

2006.06.19 00:00:00

문전안(속초서)


같은 길로 발을 들여놓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절망한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문학. 이 문학이란 것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별 상관도 없을 듯한 공무의 직업을 가진 나이기에, 뛰어난 지혜와 진실을 담고 평화와 위안을 주는 작품들을 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 결에 이제는 한쪽 발을 뺄 수 없도록 절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비록 첫걸음을 떼는 아이 수준이지만 내가 글을 쓰면서 깊이 느꼈고 또 확고해진 건, 바로 내면을 살피고 내 앞의 생을 긍정하는 진실한 글쓰기를 통해서 나의 서투른 삶을 좀 더 아름다고 나은 방식으로 바꿔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이렇듯 문학이든 사람이든 가슴속에 아름다운 것들을 몇개 품고 산다는 건 얼마나 따뜻한가. 내 작은 한몸 한줌의 재로 사그러지는 그 순간까지 그 고운 것들 내내 소중하게 껴안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감기 기운탓에 아이를 씻기고 녀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려니, 오늘따라 무척 힘이 든다. 두권을 읽고 나자 목에 무거운 통증이 일고 그만 만사가 귀찮아져 드러눕고만 싶다. 하지만 유난히 책에 욕심이 많아 눈꺼풀을 못 이겨 하면서도 그 무거운 책들을 침대 위에 가득 쌓아 올리는 녀석에게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 벌컥 화를 내고 만다.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을 보며 나도 참 어이없다. 어리석게도 내가 길들여 놓은 아이의 습관을 어쩌자고 나무라고 있으니…. 평화롭게 숨을 고르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는 아무도 살펴보지 않는 우리 둘의 삶을 생각한다. 이 목숨같은 아이에게 과연 밝고 따뜻한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으며 내가 보고 있는 한은. 그렇게 믿고 싶다.

아이와 단 둘이서 세상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세상은 마치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진 무대와도 같았다.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주시하는 관중들 앞에 갑자기 아이와 함께 내던져진 나는 머리속이 온통 하얘졌고 이내 아이를 감싸안고 비틀거렸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을 깡그리 잊어버렸고, 그런 나에게 관중 하나하나의 시선은 그대로 내 가슴에 비수로 와 꽂혔다. 경멸과 질시와 냉담의 시선속에 완전히 파묻혀 그대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삶은 지옥이었다. 그러다 언뜻 내품안에서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나는 죽지 않았고 그래서 살고 싶었다. 간간이 몇몇 누군가 박수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서서히 내가 보이기 시작하고 대사도 조금씩 떠올랐다. 어떠한 역할이라도 당당하고 능청스럽게 나를 연기해야만 무례하고 냉랭한 관객들에게 약간의 감동이라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가진 삶을 인정하고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드디어 내 삶이 빛이 나기 시작한다는 걸 알기까지 참 많이 고됐다.

독립심을 이유로 혼자 재우는 아이방에서 잠든 아이를 꼭 품고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잠들어야겠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 안의 헛헛한 마음 구석이 오늘따라 휑뎅그레하게 바람이 불지만 어차피 내가 길을 내었고 선택해온 여정속에 그 휑한 구석은 휑한 대로 그냥 놓아둬 볼 것이다. 삶은 찾는 이에게 늘 생명력이 넘치며 다양하고 아름답듯이 끊임없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나의 꿈들을 찾아가다 보면 사람과의 인연도 충만해져서 그런 것도 자연스럽게 채워져 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어떤가. 세상은 부족한 대로, 허기진 대로, 아픈 대로 그래도 살만 한 것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당당하게, 때론 능청스럽게.


윤형하 기자 windy@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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