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시인, 금천서)
꿈이런가, 벌써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저무는 무렵이다. 7월9일, 불과 하루전의 일일뿐인데, 자꾸 아득하게만 느껴지니 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잠을 자려 해도 눈이 잘 감기지 않는 것은 정량을 넘긴 커피 탓이 아니다. 아름다운 날의 기억, 아쉬운 날의 기억을 자꾸 되새김질하고 생생하게 돌이켜 보고 싶은 나의 욕심 탓이다.
우리가 만나는 날, 어제는 아침부터 전국적인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만날 약속을 생각하면 여러 걱정을 많이 해야 처지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짜릿한 추억의 만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작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갈 준비를 하는 동안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역시 아내였다.
몇주전부터 미리 이야기는 해놓은 터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게 아닌 거였다. 짐짓 염려스러운 척 나는 괜히 본전도 못 건질 소릴 은근슬쩍 던졌다.
"이거 우리 마누라, 나만 혼자 가서 어떡하나?"
"허 참, 우리가 언제 그런 사이였나 뭐?"
아침식사로 식빵을 구워주던 아내는 내 쪽은 보지도 않으면서 대꾸했다. 허나 기왕 그런 소리 예상 못한 바 아닌 나로서는 아내를 좀더 적극적으로 달랠 무슨 소리든 해줘야 했다.
"그래도 말이야, 내가 마누라를 위해 뭘 해주면 좋아할까?"
"흥,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그냥 얼른 잘 갔다 오기나 해. 지금 나가봐야 되지 않아?"
"음…. 그래도 이거 미안해서 원…. 쩝쩝…."
그냥 말로 끝내 볼까. 그럴 수 있을지도…. ㅎㅎㅎ. 허나 어림없다. 이어지는 소리.
"정 그러면 금일봉이라도 내놓고 가든지."
"뭐시라? 금일봉?"
순간 아연 긴장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면 될까?"
"한 삼만원 정도면 되지 않겠어?"
아내는 마지못한 미소로 대꾸했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나는 비로소 홀가분하게 집을 나섰다.
비는 제법 많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발지인 서울역까지 오는 동안 비맞을 일은 거의 생기지 않았다.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는 동안 용수님, 용식님, 미순님을 차례로 만났다. 미순님은 좀더 일찍 나왔는데, 앞서 만났을 때 봤던 것 같은 내 빵떡모자만 찾다가 날 몰라봤다고 했다. 아무렴 내가 이 계절에 아직까지 그렇게 칙칙한 걸 쓰고 다닐까봐?
언제나 그렇지만 너무 많은 분들이 오게 되진 않을까 걱정하던 서울팀은 결국 다섯명이 떠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 찰나, 승권님의 모습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출발까지는 이제 1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다. 우리가 예약한 열차엔 승객들이 이미 하나 둘씩 탑승하고 있었다. 용식님의 손전화가 부산나게 움직였다.
"거기 어디라구? 뭐, 사당!? 어쨌든 와라."
용식님은 자신의 짐을 모두 남은 일행에게 맡기고 먼저 열차를 타라고 하고는 곧장 승권님을 마중하러 뛰어 나갔다. 용수님, 미순님, 그리고 나는 먼저 타긴 했지만 과연 제시간까지 와서 열차를 탈 수 있을지 긴장하고 있었다.
출발신호가 울리기 일촉즉발의 시간, 벨이 울렸다. 지금 함께 탔노라는 용식님의 전화였다. 믿을 수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 사당에서 서울역, 그리고 개찰구를 지나 열차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15분. 이게 가능한 얘긴가? 그러나 승권님을 보는 순간, 그 거짓말 믿을 수밖에.
오관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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