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寸鐵活仁]剛泉寺의 봄

2002.07.01 00:00:00

本紙 논설위원, 시인 장재철(張在鐵)



전북 순창은 고추장 맛도 좋지만 경치도 좋고 인심도 무척 후했다. 가는 도중에 있는 맑고 푸른 호수도 좋았지만 봄의 훈풍으로 가득찬 깊은 골짜기는 仙境 바로 그것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가파른 길은 깊은 갖가지 꽃내음으로 마치 무슨 화장품가게안을 걷는 기분이었다. 깎아지르듯 반듯하게 높은 절벽에는 곳곳에 암굴이 있어 다람쥐들이 드나들고 그 가까이에는 반드시 그 먹이를 공급해 주는 밤나무 늙은 고목이 서 있었다.

계곡 입구에서 느린 걸음으로 반시간을 올라가면 이끼 낀 돌담안에 산뜻하게 단장한 아담한 절간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千二百년전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고찰이라는데, 6·25때 그 모두가 불타버려 근년에 그 일부 대웅전 한채만 重修되고 지금은 몇 명 女僧만 살고 있다는 것이며 터밭에서 고추모를 매가꾸는 원정의 젊은 여인의 모습이 마치 무슨 진귀한 민속화를 보는 것처럼 아늑한 정감을 안겨준다.

女僧이 앉은 터밭 옆 좁은 길가에 모과나무 고목이 한 그루 하늘높이 서있고 막 입을 벌리기 시작한 연분홍빛 꽃망울이 어린아이 입술처럼 곱게 읏고 있다.

얼마후 산을 내려와 계곡 입구에 있는 `충장집'이라는 주점에 들린 필자는 손님이 뜸한 한가한 틈을 타서 맥주 한잔을 비우면서 그 집 젊은 여주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예상한 대로 그녀의 고향은 광주시 충장로였다.

어떻게 어떤 연줄로 이 곳까지 오게 됐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그녀는 서슴없이 “제 남편이 이 곳 순창사람이에요”하고 대답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나이는 겨우 2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그다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알맞게 살이 찐 애교있는 얼굴이었다.

“친정에 가끔 가느냐”고 다시 묻는 말에 그녀는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광주분이 요즘 들어 더러 오세요.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하며 “이건 제가 대접하는 거예요”하면서 맥주 한병 마개를 따서 필자의 잔을 채우고 자기 앞에도 컵 하나를 갖다 놓고 저쪽 나무의자에 앉는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해맑은 얼굴 어디엔가 그늘이 끼어 보였다. `어떤 이유로 그리 멀지도 않는 광주와 이 곳 사이에 담을 쌓고 가장 친정집을 그리워하고 가고싶어 할 나이에 내왕을 끊고 이따금 찾아오는 낯모른 고향사람들 얼굴에서 鄕愁를 달래고 있는 것일까?'하는 연민섞인 호기심이 필자를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그 까닭을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

필자는 그곳 명물인 `도토리묵 무침'한접시를 더 시켜서 맥주 두병을 그녀와 나눠 마신 후 무슨 기막힌 곡절을 안고 사는 듯 싶은 그 어린 고향 여인의 앞날에 행운을 빌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도중 어둠이 깃드는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뭔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놓고 오는 것 같은 허전하고 아쉬운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허광복 기자 inf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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