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바람 같은 사람

2002.07.15 00:00:00

정 행 년 세무사(수필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 밖을 내다본다.

이즈음은 은행나무숲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그 옆에 오동나뭇잎들이 시시각각으로 몸집을 넓히고 있다. 지난 겨울 강풍 속에 죽은 듯이 떨고 서있던 나무들과는 딴 판이다.

숲과 나뭇잎들을 보면서 바람을 가늠한다. 큰 가지가 흔들리고 있으면 바람이 제법 있다는 것이고 나뭇잎이 몇 개 흔들거리면 바람이 조금 있다는 뜻이다. 숲이 잠자듯 고요하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층계를 내려온다.

수 년째 집 옆 야외코트에서 아침운동으로 배드민턴을 하고 있다. 실내용 운동경기를 밖에서 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영 재미가 없다. 셔틀콕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솟았다가 내려올 때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강하게 날아오다가 앞에서 뚝 떨어지기도 한다. 번번이 바람이 승패를 좌우한다. 후반전에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자리가 좋은 곳이다. 전반에 아무리 앞서갔더라도 코트를 바꾸어 바람을 맞으며 싸우게 되면 후반에 영락없이 뒤집히고 만다. 실력차이도 바람 앞에서는 무색하다.

바람은 아침운동뿐 아니라 생태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농작물에는 생존차원의 문제이다. 작년 여름, 태풍이 몰아친 후 주말농장에 가보았더니 고추밭이며 토마토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봄볕 속에서 고추모종을 옮겨 심으며 어린애 다루듯 정성을 쏟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여름 가뭄이 계속될 때는 하루하루 말라가는 채소들처럼 내 마음도 까맣게 타 들어갔다. 끙끙거리며 아파트 5층에서부터 큰 물통을 들어 날랐다. 층계를 내려와서 자동차에 물을 싣고 달릴 때는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봐 조바심을 쳤다. 그날 쓰러진 고추밭과 토마토 줄기를 일으켜 세우면서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농민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고 헤아려 보았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잘 나가던 사람이 예상치 못한 바람으로 하루아침에 낙마하는가 하면 변변찮은 사람이 바람을 잘 타서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 사회, 교육계도 예외는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몰아치는 사정바람, 졸부들이 일으키는 투기바람, 학교에서 부는 치맛바람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 자리에 신바람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년 6월 한달 내내 생애 가장 뜨겁고 감격적인 바람을 만났다. 월드컵 바람 때문이다. 그것은 환희의 바람, 감동의 바람이었다. 한반도가 떠나갈 듯이 온국민이 하나가 되어 열풍에 휩싸였다.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고… 목이 쉬고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발목은 접질렸지만 그것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밤늦도록 바람을 쫓아 광화문과 세종로, 대학로를 헤매고 다녔다. 젊은이들과 함께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쳤다. 중년의 내 몸 어디에 그런 열정이 들어있었을까.

이제 잠 못 이루고 가슴 뭉클했던 6월이 지나고 나면 바람은 다시 잠잠해 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뜨거운 열기를 한데 모아 사회 발전의 에너지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러한 감동의 새바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

며칠전 어느 세무서를 찾았다가 신선한 바람을 보았다. 산뜻하게 단장한 민원창구도 좋았지만 젊고 인상 좋은 직원들의 친절 속에서 상큼한 바람을 느꼈다. 나의 20대 세무공무원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칙칙한 건물 속에서 주판알을 들여다보던 당시 나의 표정은 주판알 만큼이나 딱딱했던 것 같다.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나는 요즘 '바람 같은 사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드래도, 갈 때는 그냥 못가요. 너무나 짧은 순간, 짧은 만남이 너무 아쉽습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노래를 부르면 흡사 내가 바람이 된 듯한 느낌이다. 골바람이 되어 계곡을 훨훨 나는 꿈을 꾼다. 나를 스쳐간 많은 수많은 바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세파를 헤쳐오며 바람을 많이 쏘인 탓인지 가슴속이 엿가락 속처럼 구멍이 송송 뚫렸다. 무엇으로 메우려해도 메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자는 조용한 밤이면 가슴 깊은 곳에 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혼자 느낀다. 돌아보면 바람과 함께 보낸 세월이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방랑자처럼 돌아다녀야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는 바람. 정처없이 밖으로만 쏘다니는 내가 애초부터 바람을 닮았는지 모른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강풍이 불더라도 하던 운동을 계속하며 살아야겠다. 열심히 살다보면 금년 같이 가슴 뿌듯한 바람을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을 안고 빠르게 달려본다.


허광복 기자 inf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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