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隨筆]비의 나그네-①

2003.03.24 00:00:00

-이운우, 영덕署


內藏山의 단풍은 아침해가 뜰 때가 좋다는 말에 천리나 되는 길을 밤새워 달려가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山行으로 돌부리에 채이고 나무등걸에 몸을 의지하며 천신만고 끝에 전망대에 올라보니 아침 햇살에 막 불 붙은 滿山紅葉이 눈 아래 펼쳐져 이를 두고 絶境인가 아니면 仙境이라 하나. 울렁거리는 가슴에 무어라 표현은 못하고 답답한데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내려가기 싫은 마음에 산 너머 더 좋은 곳이 있다기에 내장사를 휘돌아 白羊골에 들렀더니, 드디어 단풍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오후에 井邑을 뒤로 하고 古阜를 지나 변산반도의 초입 茁浦에 다다르니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씩 차창으로 떨어지더니만 石浦里의 來蘇寺 가는 언덕길 사이의 아름드리가 넘는 전나무 터널숲속 사이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지면의 열기는 수증기로 변해 피어오르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단풍위로 뚝뚝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속에 길가에 뒹구는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산없이 온 비 다 맞아도 얼굴색은 단풍 닮아 싱글벙글이다. 

빗속을 헤치며 처음 계획대로 해안선을 따라 노을이 유명하다는 格浦港으로 갔다. 안내문에는 '格浦港은 이 세상에서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요, 특히 당나라의 詩仙 李白이 배를 타고 노닐다가 詩心과 酒에 취해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 들어갔다가 영영 나오지 못하고 昇天하였다는 전설속의 그 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採石江이 있다고 했다.' 

늘 동해의 日出만 보아 온 지라 서해바다의 日沒은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몇십년만에 벼르고 벼려 왔건만 좀 서운했다.

하지만 '비록 노을은 없었지만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항구이라 하니 여기에 내리는 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위로 긴 연기를 토하며 서서히 움직이는 외항선과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곱디고운 백사장과 허리 굽은 老松사이로 날아다니는 바다새들. 왼쪽으로는 수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절벽으로 된 採石江에 쉴새없이 밀려와서 부딪히는 파도의 포말 사이로 하염없이 내리는 비. 이런 가을비 오는 날 오후에 낯선 포구의 바다가 바라보이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우리는 먼 異邦人의 심정이 되어 文學과 人生에 대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와, 그리고 가을의 시인 김현승님의 '가을의 기도'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가을비는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스며 있어 그 쓸쓸함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그리고 '이 비가 그치면 곧 추위가 오겠지. 추위가 닥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오면 또 한해가 지나가네…'했다. 

단풍과 노을을 보러 갔다가 뜻밖에 생애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을비까지 흠뻑 맞았노라고 기분좋아라 하는 그는 자칭 비의 나그네란다. '가을날엔 내장의 단풍도 너무 좋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배여 있어 生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來蘇寺와 邊山半島의 格浦港을 먼 훗날 다시 한번 더 오고 싶다'고 했다.


박상효 기자 inf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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