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隨筆]월출산에서의 사색

2003.08.04 00:00:00

-이종욱(동대구署)


현자는 말한다. 우리가 산에 가는 것은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심연 깊이 침잠하여 있는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산문에 섰을 때, 자신으로만 충만하였던 자아가 기암 절경을 펼쳐두고 말없이 바라보는 현자의 얼굴 앞에 작아지더니 흔적 없이 무너진다.

세닢대로 둘러싸인 길을 따라 묵묵히 위를 오른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더냐. 두려움 없이 삶에 도전하라. 초반에는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여기서 좌절이란 이름을 배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가파른 길목에서 유혹하는 평탄한 바위를 조심하라. 한 번 허리를 누이면 다시 펴기가 쉽지 않다. 저 고난의 정상 뒤에는 환희가 너를 둘러싸리라. 뒤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구름다리에 들어서기 전 작은 정자에서 소지품을 점검한다. 고소공포증을 호소하는 이상한 산악인이 다리 입구에서 하소연을 하고 있다. 아래를 내려보면 두려움이 발끝을 타고 머리로 전달된다. 저 절망의 계곡, 나는 묵묵히 앞만 보며 걷는다. 절망이 엄습할 지라도 절망을 바라보지 않고 맑은 하늘과 멀리 용처럼 꿈틀거리는 폭포수의 생명력을 보라.

정상이 그리 멀리 보이지 않지만 길은 다시 뒷걸음을 친다. 가파른 암벽길로 가로질러 가고픈 욕심이 일지만 생이란 순리란 것이 있는 것이다. 다시 비탈길을 내려가 오르기를 반복한다. 하나, 그 길목마다 나를 반기는 동백꽃의 군락과 청명한 새소리, 슈베르트의 선율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있다. 아! 둘러오길 잘했다는 간사한 생각이 든다.

천황봉, 언제나 목표는 정상에 있는 것이다. 널따란 바위에 등을 대니 온몸을 적시는 땀이 감사한 마음을 일게 한다. 정상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격려한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정상이 있으련만 편만한 바위는 간데 없고 발하나 겨우 올릴 조막돌이더란 말이냐. 아, 모두가 행복한 상생의 공간, 난 단지 정상만 오른 게 아니라 정상에 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상에서 땀을 식히고 먼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은 순순히 내려갈 채비를 한다. 오르는 사람을 격려하며 반가운 눈인사를 나눈다. 미왕재 산등성이에 이는 바람은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사를 위로하듯 볼을 간지른다. 선두에 간 사람들은 후미의 사람들을 욕하지 않는다. 후미의 사람들은 선두의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역량을 가름하며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베틀동굴, 임진왜란 시에 왜군을 피해 도망온 부녀자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베를 짰다는 베틀하나 들어갈 만한데다 여체를 연상시키는 야시시한 굴이다. IMF, SARS, 이라크전쟁, 북한의 핵 위협, 이러한 혼미한 정세 속에 경제난이 밀려오지만 베를 묵묵히 짜는 우리 이웃들도 장하다.

선두는 구정봉의 아홉 우물가에서 손을 흔든다. 제각기 가져온 점심을 펼치고 권하고 받으니 구름은 허리에서 놀고 마음에 쌓인 찌꺼기는 온몸에서 독을 뿜어내듯 개운하다.

햇빛 내리비치는 구정봉 암벽 연못에는 맑은 물이 반짝이고 청개구리 철없이 놀고 있다.

본격 하산길을 재촉하니 높던 해는 서쪽 바다에 걸리고 동백꽃이 더욱 화사하다.

체중을 받치느라 시달린 발을 위로하기 위하여 개울에 걸터앉아 세족식을 거행한다.

양발을 벗으니 발은 후끈 달아올랐다. 개울물은 차디차서 1분도 발을 넣어 둘 수 없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으며 지나온 길들을 떠올려 본다.

인생이 일장춘몽이라더니 아득한 추억으로만 남고 나는 늙어 가리라.

서쪽으로 일몰을 보기 급하게 달을 보리라.

금빛 바위에서 솟아오르는 월출을!


김정배 기자 incheon@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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