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紀行隨想]상트 페테르브르크의 겨울궁전

2003.08.18 00:00:00

임신빈 세무사


"독일군 침공있을때 모두 한마음으로 유물지켜 이름없이 헌신한 러시아인의 애국심에 박수를"

모스크바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북쪽 방향 1시간20분 거리, 핀란드만 옆에 위치한 상트 페테르브르크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가 폴타바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1703년 '유럽으로의 창문', '열린 바다의 도시' 건설을 위해 늪지대였던 곳을 돌을 쌓아 만든 기획된 도시다. 그 어원은 상트는 성스러운(라틴어), 페테르(표트르의 네덜란드식 발음), 브르크는 도시(독일어)를 의미, 즉 다국적 합성어의 이름으로 결합된 도시 이름이다. 그리고 '성 베드로의 도시'라고 하는 신화적 의미도 갖고 있고 '돌의 도시', '흰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하는 명칭도 함께 갖고 있다. 상트 페테르브르크에는 유유히 흐르고 있는 네바강(Neva江)이 있다. 그 강변에 위치한 겨울궁전은 이 도시의 대표적 건물이다. 그 곳에 에르미타주(Hermitage) 박물관이 함께 있기에 더욱 유명하다.

연록색의 파스텔 색으로 건물 외벽을 칠하고 주름처럼 흰색의 태와 조각이 붙어 있는 곳은 황금색으로 도색한 수채화같은 건물로 금년 300주년(2003.5.27)을 맞이하여 새롭게 도색을 하여 더욱 아름다웠다. 200여개가 넘어 보이는 지붕 위에 서 있는 조각상들이 어쩌면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 낸 영웅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조각상들은 비가 오나 눈보라가 치나 수백년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겨울궁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러시아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 겨울궁전은 처음에는 표트로 대제의 저택이었다. 표트로 대제가 죽고 뒤를 계승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와 또 그 뒤를 이어 안나 여제가 계속 증축을 하여서 지금에는 방, 거실들이 100여개를 넘고 120여개의 계단과 1천800개의 출입문이 있다. 방, 복도, 계단, 전시실들을 합한 총 길이가 27㎞나 된다고 하는 거대한 건물로 러시아 황실의 겨울 거처지이자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더운 여름은 바다가 보이고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진 여름궁전에서 보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비치된 미술품, 골동품, 귀중품이 270여만점으로 5년을 걸려야 다 볼 수 있는 분량이라 한다. 몇분지 일의 귀중품만 팔아도 러시아 재정이 확 바뀔 수 있다고들 한다. 귀중품들 중에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그림, 조각품들과 약탈한 물건, 선물로 받은 희귀한 골동품들이다.

그림에 있어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돈나', 렘브란트의 '아브라함의 제물', 고갱의 그림, 앙리 마티스의 춤추는 그림, 피카소 등의 그림들로 방마다 명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브론스, 돌로 된 조각품들도 그 크기 수량, 예술성 등 관객의 입을 벌리게 했다. 17세기 인물 초상화 수백점들이 관람객을 압도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고 선물로 받았다는 황금마차는 구경꾼들의 기를 죽이고 있었다. 방이 아닌 한 복도에서 김흥수 화가의 '승무'의 그림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국 낯선 곳에서 태극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예카테리나 여제(女帝)는 자신의 소장품을 관람할 때에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하고 어기면 벌을 내리게 했다고 한다.
1. 칼, 모자, 모든 사회적 지위는 문 밖에 두고 올 것
2. 파벌, 양심도 문 밖에 두고 올 것
3. 옆사람 방해 안되게 조용히 담소할 것
4. 미술품 앞에서 하품을 하지 말 것
5. 미술품 앞에서 한눈 팔지 말 것 등

규칙을 한번 어기면 찬물을 마시게 한 뒤 고전시 한 수를 읊게 하고 두번 어기면 두 수를 읊게 하고 열번이상 어기면 영원히 에르미타쥬 박물관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참 재미있는 규칙이였다는 생각과 함께 푸쉬킨의 시가 애송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러시아 문학이 발달하게 된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의문을 가져본다.

나는 4시간이 넘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동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작품들 속에 도취되어 피로도 잊었다. 차츰 피로를 느낄 무렵, 우리나라 삼성전자가 러시아인 상대로 갖가지 경품을 내걸고 비가 오는데도 '달리기 대회'(2003.6.21 토)를 하고 있는 모습이 창을 통해 보였다. 확성기에서 퍼져 나오는 요란한 음악소리는 눈을 자꾸만 창 밖으로 끌어 당겼다. 빗속도 아랑곳하지 않고 몰려든 러시아인들, 삼성전자에서 나누어 준 티셔츠가 빗줄기에 젖어 몸에 붙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품을 타려고 열심히 뛰고 있는 수천명의 군중들! 한국의 국력이 그 곳에서 더욱 자랑스럽게 다가왔다. 고갱의 그림방에서도 내다보고 피카소, 마티스의 그림 전시실 등에서도 피곤해진 다리를 쉬면서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규칙을 어긴 자에 대한 벌 생각이 났다. 아마도 나는 다시는 에르미타쥬 박물관 출입이 영원히 금지된 처벌을 받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웃음을 삼켰다.

17세기 초상화를 보면서 돈 많은 귀족들이 가난한 화가들을 키웠다는 생각을 했다. 귀족은 화가의 생계를 책임지고 그 화가들은 전심전력 1년 혹은 2년 한 작품에 혼을 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러한 명작들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황실의 마루바닥을 보았다. 상감으로 수를 놓은듯 그 넓은 바닥을 똑같은 문형으로 깔아 놓았다. 기계도 없었던 시절 일일이 손으로 깎고 다듬기 위해 몇천명의 목수가 동원되었을까? 눈물겹도록 이색적이었다. 또 황실의 벽들은 분홍색, 흰색, 연록색 대리석들로 조화를 이루며 꾸며져 있었다. 이삭 성당의 기둥·벽들의 대리석 이상으로 색채가 더 아름다웠다. 겨울궁전을 다 지을 때까지 전국에 대리석 건축물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대리석 벽과 기둥에는 정교한 크고 작은 조각품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붙어 있었다. 영하 20°가 넘는 밖의 추위와는 반대로 건물 안에서는 대리석에 조각품이 잘 붙고 빨리 건조시키기 위하여 80°이상의 열을 가하게 했다 한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차출당한 인부 6천여명이 매일 노동에 혹사당하고 100°가 넘는 기온차 속에서 탈진하거나 기아에 쓰러져 죽어간 수는 꼽을 수가 없었다 한다. 산과 들, 어느 곳을 파도 그 당시 희생당했던 노동자들의 뼈들이 나왔다고 한다. 오죽하면 '흰 뼈들 위에 세워진 도시'란 이름이 붙어 있겠는가?

황실의 거실, 침실, 접견실, 식당의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움은 급에서도 최상의 급이라 할 수 있었다. 황금으로 도색된 벽과 천장의 조각 무늬들, 보석으로 된 장식품들, 찬란한 샹데리아, 어느 황제가 입었던 의상이 유리상자속에서 눈길을 끌었다. 탈색되고 천은 낡았지만 금사(金絲)만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인 옷자락에서도, 제정 러시아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인력 착취, 농민들의 금품 수탈 등 국민의 희생 위에 황실의 사치가 존재해 있었다.

독일군의 침공이 있었을 때 박물관 직원들과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브르크) 시민들, 그리고 도자기 공장의 포장 전문가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 그 많은 박물관 소장품들을 22칸 기차에 싣고 우랄산맥 근처에 대피시키고 나머지 유물들은 지하실에 옮겨놓고 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이겨냈다고 한다. 이라크 전란 때는 국민들에 의해 박물관의 귀중품들이 모두 도난당하고 파괴되지 않았던가! 이름없이 헌신한 러시아인의 눈물겨운 노고와 애국심에 존경과 함께 소리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러시아를 구원하는 것은 대지의 삶에 순응하는 선(善)이 아니라 미(美)라고 했던 것처럼 겨울궁전의 외벽 혹은 내장과 소장품들 어느 것 하나 미(美)를 떠나 존재된 것은 없었다.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러시아인의 보물이며 온 세계인의 귀중품이란 생각을 했다.

겨울궁전을 나서면서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확신 같은 것을 갖게 했다. 그리고 겨울궁전에 바닥, 벽, 기둥, 천장, 문짝 등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붙어 있는 아름다운 조각들을 떠올렸다. 그 수 이상으로 희생된 흰 뼈들이 남기고 간 걸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들고 있음을 보았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미술품에 대한 남다른 애호의 결과가 제정 러시아 재정의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했고 희생도 많이 시켰지만 지금에 와서는 러시아 국민을 위한 재정의 큰 수입원으로 그 당시 혹사시킨 받는 것이 대가이상의 보상을 앞으로도 무궁무진 계속될 것으로 보았다.

걸작 뒤에는 희생이 커야 성취된다는 원리가 겨울궁전을 보고 한 말이 아닐까?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독재정치의 잔재는 어떤 형태로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03.7.10>


김정배 기자 incheon@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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