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隨筆]외갓집-上

2003.09.08 00:00:00

-이운우 영덕세무서


벼가 검푸르게 자라나고 맑은 시냇물이 쉴새없이 흐르는 실개천 둑길을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이파리가 바람 한점 없이도 흰 속살을 살랑대는 들길을 지나자 동네어귀 느티나무 쉼터가 나오고, 군데군데 누런 호박덩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나팔꽃 넝쿨로 엉킨 토담 너머로는 키 큰 해바라기 싱겁게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거름 익는 냄새가 풍기는 꼬불꼬불 황토 길 골목엔 한 포기에 줄기마다 화사한 분홍, 주홍, 보라, 흰색의 꽃망울을 매단 봉선화가 부끄러운 듯 미끈한 다리를 내어놓고, 돌담 사이엔 오종쫑하게 핀 보랏빛 채송화는 바람이 지내가다 슬쩍 씨앗을 떨구었나, 보는 이 없어도 저만치 혼자 피어 있네. 마당에 들어서니 한 낮의 오수를 즐기던 삽살개가 낯선 사람이건만 짓지도 않고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유년 시절, 여름방학만 되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외갓집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네 이웃집에 방학을 맞이하여 외갓집에 놀러 온 아이들을 보면 왜 그렇게 부럽고 좋아 보이던지…, 외갓집 식구들의 알뜰살뜰한 보살핌속에 온갖 맛있는 음식과 특히 외할머니의 유별난 사랑과 정을 듬뿍 받으면서 며칠씩 머물다 가는 또래의 애들을 보고 시샘이 날 때마다 들일 나간 엄마에게 우리도 외할머니 집에 가자고 조르곤 했었다. 그때마다 먼 북쪽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지으시는 엄마가 왜 그렇게 야속하던지 아무런 철도 모르고 무조건 보내 달라고 떼를 쓰다 빗자루로 많이도 얻어맞곤 했었지. 당시에는 내게는 왜 외할머니 집이 없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서러운 방학만 되면 어디론가 아무데나 갔다 와서는 나도 외할머니 댁에 다녀왔노라고 자랑을 한번이나 하고 싶었다.

지난주 여름휴가 중 아이들의 외갓집에 다녀왔다. 애들은 벌레가 많고 시골 냄새가 난다고, 특히나 컴퓨터도 친구도 없고 해서 재미없다고, 외갓집에 가느니 집에서 오락게임이나 하며 쉬겠다면서 엄마 아빠 두분만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 모처럼 장모님 혼자 계시는 시골집에 가니 처마엔 비가 새고 집안 여기저기 손 볼 데가 많았다. 대충 정리를 해놓고 집 앞의 고추밭으로 갔다. 그런데 너무나 기가 막혔다. 고추밭은 군데군데 말라서 누렇게 변해 죽어 있었고 그나마 좀 푸른 것은 아침부터 시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봄날과 여름 내내 고생하며 가꾸어 이제 막 수확기에 접어들었는데 긴 장마와 냉해로 인한 탄저병으로 하루사이에 뿌리가 썩어 밭 전체가 마르기 시작한다면서, 장모께서는 "올해 고추농사는 접었네, 하느님이 올해는 좀 비싸게 고추를 사먹으라고 그러시는 모양인 갑다…"면서 별 원망도 없이 모든 것을 자연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래도 먹을만한 것을 골라 고추장아찌를 담그면 되니까 얼른 얼른 고추를 따라고 하셨다.

따가운 햇볕아래 고추를 따서 포대에 담고 마른 고춧대를 뽑아내고 밭을 갈아 철이른 가을 무, 배추 심는 일을 해보니 금방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쉴 참 때가 되었다면서 부르기에 가보니 감나무 그늘아래 평상에는 언제 사오셨는지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와 사위라고 깊이 간직 해 놓은 듯 오래된 쇠고기까지 볶아 내어놓으시고, 이것저것 한가지라도 더 챙겨 먹도록 애를 쓰시는 것을 보니 어릴적 못 가본 외갓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 막걸리 한잔에 금방 밭에서 따온 풋고추가 제격이라 대충 물로 헹구어 된장에 찍어 먹으니 더위가 싹 가시고 나물 안주에 막걸리라 맛이 꿀맛이었다.


김정배 기자 incheon@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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