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寸鐵活仁]李栗谷 선생의 따뜻한 情과 義理

2004.09.13 00:00:00

-가슴 뿌듯한 逸話 몇가지


이율곡(이름은 珥) 선생은 그 당시의 점잖고 꼿꼿한 유학자(儒學者)로서는 드물게 수더분하고 인혜(仁惠)로운 학자로서 조선조 중종 31년(1536년)에 출생, 그 불후지방(不朽之芳:영원히 남을 명성)의 여류 문인(女流 文人)이며 화가인 어머니 '신사임당' 슬하에서 학문을 배워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고 13세에 소과(小擧)에 들고 그후 아홉차례에 걸쳐 각종 대과(大擧)에 장원급제를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시인(詩人)이고 현상(賢相)이며 철인(哲人)으로서 많은 공훈(功勳)을 남겼으며, 한 인간(人間)으로서의 따뜻한 정미(情味)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루는 동료 고관의 '득남(得男:아들을 낳음) 잔치'에 초대됐는데 그 자리에 곱게 단장한 기생(妓生)들이 와 있자 선생과 가까운 친구인 우계(牛溪^成渾) 선생은 "이런 자리에 기생은 무슨?"하고 투덜댔다. 그러나 선생은 "옷에 물을 들여도 사람의 마음은 검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껄껄 웃으면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가장 예쁜 미기(美妓)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바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꾸밈없는 남심(男心)이다.

선생이 젊어서 황해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있을 때 류지(柳枝)라는 이름의 시비(侍婢:하녀)가 있었는데 원래는 선비의 딸로 집안이 어려워 가족의 부양(扶養)을 위해서 나중에는 기생이 됐다. 용자(容姿)가 예쁘고 얌전한 그녀는 선생이 고향인 황주(黃州)를 드나들 때 한두번 만나서 좀 도와준 것 뿐인데 선생을 마음속 깊이 사모(思慕)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가 선생의 천전(遷轉:전근)길을 배웅하고 돌아가다가 그리운 정에 끌려 다시 선생의 뒤를 밟아 머나먼 밤길을 걸어서 선생의 유숙처(留宿處:여관)를 찾았다.

뜻밖의 방문을 받은 선생은 반갑기도 했지만 종자(從者)들보기에 체면도 있어 당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류지를 정중히 방으로 맞아들이고 그 마음을 다음과 같은 글귀로 적어주고 방안에 등잔불을 끄지 않고 토방 밑에서 우는 방울벌레(귀뚜라미) 소리를 같이 들으며 긴 가을밤을 뜬눈으로 지새워 인(仁)과 의(義)를 지켰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들 생각으로는 의(義)는 몰라도 인혜(仁惠)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여부는 읽은 이의 판단에 맡기고 논집(論執)을 피한다.

'폐문(閉門)에 상인(傷仁), 동침(同寢)에 해의(害義)'

"방문을 닫고 돌려 보내자니 인정(仁情)이 상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자니 의리를 해친다"

선생은 선조왕때 '이조판서(吏曹判書:지금의 장관)'를 지내면서 다가오는 국란(國亂^임진왜란)을 예측하고 십만양병(十萬養兵)을 강력 주장했지만 당쟁(黨爭)에 몰익(沒溺:빠져 가라앉음)하던 조정 중신(朝廷 重臣)들의 '민심을 어지럽히는 짓'이라 내몰리고 말았던 것이니, 이는 두고 두고 통탄(痛歎)할 일로 지금은 그런 일이 없는지? 행여 의제개혁(擬製改革)이 배설하는 금즙(金汁)에 섞여 애써 손톱으로 줏어 담는 민복(民福)을 거치른 키(質)로 까불러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동난초연리(冬暖草筵裡:풀거적 속이 따뜻하다'고 엄동(嚴冬)에 한데 잠을 자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찌근찌근 아파온다.


김정배 기자 incheon@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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