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寸鐵活仁]田家(농가)의 悲戀

2006.03.13 00:00:00

韓男과 日女의 棘縟(가시방석) 夜臥


 

왜정초 광주천변 야촌(光州川邊 野村)마을에 구늬모도료지(國元良二)라는 일본인 농가(農家)와 정윤모라는 농부(農夫)가 살고 있었는데 정씨의 아들 영태(永泰)와 구늬모도의 딸 시게꼬(繁子)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정영태는 그때 일본 동경(東京)에서 유학 중이었고, 시게꼬는 광주 대화여고(大和女高)의 졸업반이었다. 시게꼬의 집은 농업이민(農業移民)으로 처음에는 가난한 농가였지만 일제(日帝)의 수탈정책(收奪政策=빼앗는 정치)의 비호(庇護=감싸고 보호함)속에 요족(繞足)한 생활을 했고, 영태의 가정도 근검(勤儉)으로 이룬 부농(富農)으로 그 두 집은 오래 사귀는 동안 정숙(情熟)이 되어 내왕이 잦은 편이었다.

영태와 시게꼬는 중학시절 같이 기차통학(汽車通學)을 하면서 남매처럼 지냈는데, 시게꼬는 영태집을 찾아가 학습지도(學習指導)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두 남녀는 결혼약속까지 했는데 그 사실을 양가(兩家) 부모가 알게 되자 사단(事端)이 벌어지고 말았다. 두 집의 부모는 이를 반대하고 나섰고 특히 시게꼬의 부친이 더 심했다. 인종(人種)이 다르고 영태의 부친이 무식하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그러나 부모의 저지(沮止=못하게 막음)하면 그럴수록 젊은 그들의 사이는 더 뜨거워지기만 했다. 그것을 보다못해 구늬모도는 평소에 존경하는 같은 마을에 사는 학자이며 덕망(德望)이 있는 조원석(趙元錫)씨를 찾아갔다. 영태의 설득(說得)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학문과 소양(素養)이 깊은 조공(趙公)과 구늬모도는 가끔 가다 고사성어(故事成語)나 한문으로 문답(問答)하기를 좋아했다. 한일 양국의 언어(言語)의 오혹(誤惑=잘못 풀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공은 들리는 소문으로 두 남녀의 '애정관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인종은 다르지만 영태는 뛰어난 재질(才質=타고난 재주)과 학식(學識)으로 장래가 촉망(囑望=잘 되기가 기대됨)되는 청년이고, 시게꼬의 얌전하고 옳곧은 성품을 잘 아는 조공은 썩 어울리는 커플(한쌍)로 맺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터였다.

조공은 말 대신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서 응답(應答)을 했다.

노봉검객수정검 불시인즉막헌시(路逢劍客須呈劍 不詩人卽莫헌詩)

'길에서 칼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칼을 주고 시인이 아니면 시를 지어주지 말지어다'

요컨데 당자(當者)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구늬모도는 그 글의 뜻을 잘못 해독(解讀)하고 뒷글 '막헌시(莫헌詩)'를 곧이곧대로 '딸을 주지 말라'로 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두 남녀의 애정은 부모의 반대가 거세지자 오히려 열기(熱氣)를 더하고 여름방학때 서둘러 귀국한 영태와 시게꼬는 부모의 눈을 피해 벼 우거진 좁은 들길을 십여리(十艅里)나 걸어서 서창면 동하(洞荷)마을 앞에 있는 호젓한 수중정자(水中亭子) 만귀정(晩歸亭) 시원한 마루바닥에서 밤을 지내곤 했다.

그러나 그 두 남녀는 끝내 맺어지지를 못하고 종전(終戰=광복)이 돼 학병(學兵)으로 끌려간 영태의 귀국이 늦어지자 시게꼬는 본국(일본)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따돌리고 조선인 친구집에 숨어살다가 영태가 남방(南方)에서 전사했다는 헛소문을 듣고 그해 초겨울 영태와 '랑데부코오트'(密會場所)인 갈대 우거진 깊은 방죽가에서 학생복 차림의 영태의 사진을 품에 안고 익사체(溺死體)로 발견됐다.


김원수 기자 ulsan@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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