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누룽지를 끓이며(上)

2006.06.05 00:00:00

문전안(속초서)


"딩딩…. 두구두구…. 위이…. 뛰웅…. 윙윙…."
17인치 컴퓨터 모니터가 불꽃이 튄다. 요란하게 터져나오는 전자음과 불빛들에 빨려 들어갈 듯, 연신 입을 나불대며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는 아이의 뒤통수가 바라다 보인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집요하게 새어나오는 열기와 광채가 현란하다. 제법 굵어졌다고, 꾸짖는 내 말을 잘라 군시렁거리는 녀석의 얼굴엔 요즘 부쩍 활기와 짓궂음이 가득 배었다. 사실 말이지만, 엄마로서의 임감이 아니라면, 6살난 사내아이의 흘러넘치는 활기는 내 성질에 맞지 않다. 아무리 맘을 고쳐먹어도 그 산만스러움이 기가 막히게 버거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 밝은 구석이 많은 녀석에게 안도하며 살아가는 아이의 엄마다.

"민영아. 이제 그만! 밥 먹어야지…. 민영아. 엄마 말 안 들리니? 안돼. 자, 그만". 투정하는 아이의 손을 씻겨 간신히 식탁에 앉히고서 나는 밥을 퍼 낸 솥에다 물을 붓고 가스불을 올린다. 요즘처럼 코 끝 시린 바람에 얼얼해져 돌아오는 저녁에는 이렇게 뜨겁게 달군 돌솥에다 끓여내는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가 더없이 마음을 덥힌다. 딱 두 사람분의 앙증스런 돌솥이 보글거리는 이 저녁의 평화로움에 더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생선을 김에 똘똘 말아 밥그릇을 억지로 비우고 겨우 얻어낸 누룽지를 후후 불며 맛나게 먹는 아이의 그릇에다 내 것을 더 떠 넣자 아이는 신나게 다리를 흔들거린다. 아파트 창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황량한 저녁, 불빛 환한 식탁에 앉아 누룽지를 떠 넣고 있노라면 거실 한 켠으로 따뜻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내 마음은 뭉글뭉글 행복이 피어오른다.

얼마전 나는 내 생일을 맞아 아이와 둘이서 사진을 찍었다. 갈수록 확실한 존재감으로 커가는 내 아이와 이제 세상을 긍정하게 된 30대 막바지의 내 마지막 젊음의 모습을 정지된 화면으로 남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나와 아이의 표정이 꽤 괜찮아 보인다. 계절이 바뀌어 옷장을 정리하면서 가끔 옷장 한 구석에 넣어두는 사진첩을 들여다 볼 때가 있는데, 지나온 나날의 이곳저곳을 걷다가 빛이 뿜어져 나올 듯한 내 20대의 활짝 핀 젊음을 바라보면 아득하게 미소가 떠오르곤 한다. 저런 환한 모습 뒤에 그 까마득한 고뇌가 서려있었다니…. 부끄러웠고, 열락에 들떴으며 때론 회한으로 눈물겨웠고 참담했고 분노했고 때론 기쁨의 유리알들이 반짝거려 내 영혼을 위안하던 지나온 내 모습을 다시 들춰보는 일은 얼굴 붉어지면서도 묘한 쾌감이 있다. 먼 훗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불현듯 생의 갈피를 하나하나 넘기며 나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으리라.

"어머, 예쁘게 나왔네요. 민영이 엄마, 이렇게 보니 또 달라보이네요". 커피물을 채우는 내게 옆집 여자 종현 엄마가 거실에 걸린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며 한마디 한다. CD에서 은은한 추억의 팝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흐뭇해진 표정으로 식탁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종현 엄마. 혹시 노학동에 까페 '베이스 캠프' 알아요? 거기 멋진 말총머리 주인한테 얻은 거에요. 사무실 사람들하고 몇번 가봤는데…. 음악하는 사람이라 분위기가 아주 근사하더군요. 요즘 저것만 계속 듣고 있어요." 주말이 되면, 늘 우리 집에서 한 패거리가 되는 아이들을 살피러 왔다가 이젠 으레 내게 차를 마시러 오는 그녀. 늘씬한 키에 아주 세련된 외모와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아들만 셋을 둔 가정주부이다. 인상부터가 사랑을 위해선 물불 가릴 것 같지 않은 순정파 남편에게 꿰어서 일찌감치 결혼했다는 그녀는 최악의 상황이랄 수 밖에 없는 아들 셋을 용감하게 키우고 있는데, 얼굴에 기미가 내려앉았어도 꽤 미인형인 데다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아선지 가끔씩 현관문을 닫고 외출하는 그녀를 마주칠 때면 그 세련된 화장과 옷차림에 눈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느라 끊임없이 분주한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주말이면 가끔씩 음악이나 여행, 취미 따위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내가 꽤 편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오상민 기자 osm1158@hanmail.net
- Copyrights ⓒ 디지털세정신문 & taxtime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발행처: (주)한국세정신문사 ㅣ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17안길 11 (서교동, 디.에스 빌딩 3층) 제호:한국세정신문 │ 등록번호: 서울,아00096 등록(발행)일:2005년 10월 28일 │ 발행인: 박화수 │ 편집인: 오상민 한국세정신문 전화: 02-338-3344 │ 팩스: 02-338-3343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화수 Copyright ⓒ 한국세정신문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