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세무서 천정이 어떻게 생겼을까?
대구로 올라온 나는 북대구세무서 주세계(酒稅係)로 배치를 받았다.
그 당시 주세업무는 주류 제조판매에 대한 면허(免許)업무 와 제조장(양조장)에 대한 주세검사 업무 및 부정주류(밀조주)단속업무를 담당했다.
면허 등 중요 업무는 차석님이 담당하며 주로 내무를 봤고 제조장(양조장) 점검은 관내에 흩어져 있는 사오십여개의 양조장을 나머지 직원 4명이 4개조로 나눠 조별로 십여개씩 나눠 맡아 한 달에 4회이상 점검을 하였다.
밀조주 단속 출장은 넓은 관내지역 시골마을을 돌면서 한달에 2번 이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달 내내 외부출장으로 무척 바빴으며 사무실 책상앞에 앉아 차분하게 일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 산업이 보잘 것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양조장을 갖고 있다면 지역 유지(有志)는 물론, 부자(富者)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세무서에서는 고액납세자 측에 들었다.
그 당시 '주세법'은 양조장에서 작은 실수를 해도 제조면허를 정지시키거나 취소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세무당국에 부여하고 있었다.
양조장 사장님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세무서에 있는 셈이어서 우리가 주세검사를 하기 위해 출장을 나가면 마치 암행어사가 출두한 냥 칙사(勅使) 대접을 했다.
양조장 사장님들은 아직까지 세무서 천정을 한번도 쳐다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세무서를 두려워했다.
주세검사는 제조원료(종국, 곡자 등)의 구입과 사용은 잘하고 있는가? 주류는 정확하게 수불하고 있는가? 면허조건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가? 또한 적정도수를 유지하고 있는가? 제조장 위생은 철저히 하고 있는가?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확인하는 검사이다.
걸리면 그냥 작살이 나는 처분이 따르기 때문에 검사 때에는 그야말로 초비상이 걸린다. 그것도 한달에 네번이상 받아야 하였으니 죽을 맛이었음이 분명하다.
칙사 대접이라 해 보았자 작은 바구니에 계란을 여러개 담아와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 그 당시 시골에선 최고의 접대이었던 것 같다. 한두개 먹고 나면 배가 부른데 또 먹으라고 끈질기게 권한다. 거절을 하면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또 받아먹으려니 도저히 넘어가질 않았다.
그것보다 나를 더욱 못 견디게 하였던 것은 계란을 가져 올 때나 주류검사 장부를 가져 올 때 그들이 하는 행동이다.
마치 옛날에 임금님 앞에서 두 손 모아 읊조리는 신하(臣下)들 같이 공손하기 짝이 없다.
사장님은 안방 윗목에 책상을 준비하고 검사할 장부를 가져다가 정돈해 놓고서는 엉금엉금 가재 걸음을 하며 뒤로 기어가서는 문쪽에 공손히 꿇어 앉아있다.
'과연 저들이 나의 무엇을 보고 저렇게 주눅이 든 것일까?'
'사장님의 아들은 서울대학을 다니고 있다는데….'
'우리 아버님보다 훨씬 돈도 많을 터인데….'
그런데 지방대학 4학년에 그것도 세무서에 입사한 후 야간부로 옮겨 다니고 있는 가난한 교장선생의 아들에게 저토록 아첨과 굽신거림을 보이니 오히려 나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워진다.
'저들은 한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한 권력 앞에 꿇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들이 꿇어앉으면 나도 같이 무릎을 꿇었다.
"영감님! 이러지 마십시오."
"손자 또래밖에 되지 않은 저에게 왜 이러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유가 없다면 앞으로 이러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때까지 관습적으로 하던 이러한 양조장 사장님들의 과잉행동을 조금은 바꿔버렸다고 자부(自負)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때 납세자는 그렇다 치고 우리는 기고만장 군림(君臨)하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
"역시 교육자이고 양반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저 직원은 달라."
정말로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칙사 대접을 받는 것에 현혹이 되어 맛이 가버린 직원들은 마치 자기가 잘나고 대단해서 그런 줄 착각하고는 기고만장 거들먹거리며 '또라이' 행세를 하는 직원을 그 당시에는 너무 쉽게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때 납세자는 그렇다 치고 우리는 기고만장 군림(君臨)하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
납세자의 굽신거림은 한 인간에게 그러는 게 아니라, 작은 조세권력 앞에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착각하지 말자.
오늘날 국세공무원은 세금을 파는 '세금장사'이고, 납세자는 세금이라는 상품을 사는 고객이라고 본다면 Sales는 누가 하고 또 A/S는 누가 해야 할 것인가?
8. 제일 괴로운 업무 '술 단속'
생각해 보면, 국세청에 들어와 제일 하기 싫었던 업무가 바로 밀조주 등 부정주류 단속이었다. 그것도 농촌 출신이며 겨우 스물세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놈이 그러한 일을 하기에는 정말 괴로웠다.
적발이 되면 일년 지은 농사를 벌금으로 날려버리게 된다.
그런 출장을 직원 네명은 월 2회이상 가야 했고 일정한 책임건수를 채워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그 당시 시골 농가에서는 '농주 또는 동동주' 라고 일컫는 막걸리를 조금씩 담그었는데, 그게 바로 허가도 없고 세금도 내지 않은 부정주류(밀조주)라 하여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만일, 이것을 방치하면 양조장의 매출이 떨어짐은 물론, 주세 수입도 감소되고 농촌은 무질서한 음주문화가 성행돼 국가 전체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단속업무는 불가피하단다.
규모가 큰 기업형 밀조주 제조장은 몰라도 농민들이 그냥 식사 반주로 마시는 소규모의 농주(農酒)는 그냥 넘어가도 좋을 성 싶다.
그러나 양조장측에서는 단속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양조장 사장으로 구성된 '양조장 협회'에서는 소위 '술단속원'으로 부르는 직원을 체용해 놓고, 단속출장에 우리와 함께 동행을 시켰다.
세무공무원들은 단속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단속경험이 있는 단속원들의 숙달된 솜씨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교묘하게 숨겨놓은 밀주용기나 부정 누룩을 귀신같이 용케도 잘도 찾아냈다.
우리는 주로 뒷짐을 지고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나이도 우리보다는 휠씬 많고, 그 방면에서는 노련했기 때문에 출장을 나가면 오히려 그들이 반장 행세를 하고 마치 세무서 정규(正規) 직원인 것처럼 행동을 했다.
벌과금 양정이나 고발처리 등은 검찰의 '지명서'를 갖고 있는 정규직원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다.
첫 단속출장을 다녀온 그날 밤이다.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시골 아낙네에 쫓기다 절벽에 굴러 떨어지는 꿈을 꾼 이후 나는 과장님께 다른 부서로 옮겨 달라고 몇번이나 요청을 했다.
"진짜 세무공무원이 되려면 이런 경험을 해 봐야 된다."
"선배들은 모두 이런 과정을 경험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괜찮아질 것이다."
과장님의 설득에도 나는 정말 그 일이 싫어 다른 과로 보내 달라고 계속 졸라 대었다.
"주세계에 서로 오려고 그러는데 그냥 참고 견뎌 봐!"
옳거니!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나는 우리서의 매월 단속실적을 지방청에 보고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거기를 보면 개인별 단속실적에는 정식으로 밀조주를 적발해 고발한 건수(件數)와 그냥 어느 동네 길가에서 밀조주가 들어 있는 용기를 발견해 임의(任意)로 폐기 처분한 건수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의 단속 실적은 그걸로 몽땅 채워 버렸다.
나는 상부기관의 감사가 나올 때마다 이런 '주의서'를 많이 받았다.
[귀하는 ○○기간동안 부정주류 단속에서 임의폐기한 실적 이외 고발한 실적이 극히 저조하므로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없도록 주의할 것]
이런 '주의서'는 수백번 받아도 좋았다.
요즘은 여느 음식점에 가보면 동동주라 하면서 버젓이 부정주류를 내다 팔고 있는데도, 그리고 아직도 '주세법'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도 그냥 넘어가는 것은 단속의 실익이 없기 때문인가?
옛날 같으면 쉽게 건수를 올렸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언간 30여년이….
나를 괴롭히던 단속업무는 서대구세무서로 전보되면서 끝이 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