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친구가 된 박 상병
월남편지 사건의 장본인 박 상병을 찾아 나섰다.
그를 드디어 만난 것은 '73년 8월초 어느 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천호대교'가 생기기 전 구(舊)다리 '광진교' 밑에 초라한 함석집이 그의 집이었다. 있으나 마나 다 부서진 대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보니 그집 아주머니가 옷가지를 빨랫줄에 걸고 있었다.
박 상병의 어머니다.
마당 좌우에는 십자매, 잉꼬새 등 관상용 새들을 키우고 있는데 마치 나를 반겨주듯이 심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아주머니, 여기 '박○○'이네 집입니까?"
"성아! 칭구 왔다."
그의 어머니는 나의 묻는 말은 무시한 채 방쪽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후, 오래 세수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덥수룩한 녀석이 반바지 차림으로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 누군데요?"
나는 대답 대신에 그 놈의 턱에 라이트를 한방 먹여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동네사람을 불러댔다.
그날 저녁 영문도 모른채 나에게 두들겨 맞은 박상병과 나는 포장마차에 마주앉았다.
그는 '장난편지'는 읽어봤으나 그 뒤에 내가 보낸 해명편지는 받아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물론 내가 보낸 잡지책을 한 번도 못 봤다나.
그럼 어떻게 된 걸가? 편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듣고는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는 처음 편지를 받아본 후 얼마 되지 않아 정찰작전 중에 '배트콩'의 총격으로 왼쪽가슴과 무릎을 관통하는 큰 중상을 입고 의병제대했기 때문에 국방부에 보낸 편지는 틀림없이 그때 소대장인 ○○소위가 한 짓이 틀림없을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그 편지를 전 부대원들 모두가 다 읽어 보고 한바탕 크게 웃고 넘어갔었는데 유독 소대장이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흥분하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란다.
그는 별 신통한 직업없이 그냥 집에서 관상용 새를 키워 팔며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가슴관통의 결정적인 후유증을 헤쳐나오지 못하고 5년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와는 몇년간을 정말 다정한 친구로 지냈다.
나는 외동아들이었던 '○○'이를 대신정성껏 그의 어머님을 모셨다.
지금도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하던 차분한 성격의 '○○'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16. 눈뜨기 시작한 공무원생활
별 능력도 없고 재주 또한 없는 몸이라 서울에 와서 변두리 세무서만 왔다갔다 하는 내 자신을 보면 미워진다.
그해 여름에 울적할 때마다 찾아가는 '송전저수지'에서 3일간의 여름휴가를 나 혼자 낚시로 보내고 있었다.
참으로 인생(人生)은 허무한 것이구나!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상념에 잠기고 있을쯤, 좌대 관리인 신씨가 서울에서 전보가 왔다고 전해준다.
[재무부 발령. ○○월○○일 출근 요]
집에서 보낸 전보였다.
'느닷없이 재무부는 또 뭐야?'
나는 그리로 발령이 난 것이 내심 싫지는 않았다.
국세청 출신들이 대부분이라 예의범절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인가? 윗분이 퇴근하지 않으면 일이 없어도 마냥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아무리 7급 하위직 공무원이라 하지만 아무런 상의와 사전에 연락도 없이 마치 돼지목에 밧줄 달아 끌려가는 것 같아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아무리 하위직이지만,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과장님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고 P과장님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달랜다.
"일년만 고생하면 다시 국세청에 보내 줄게. 이렇게 왔으니 같이 한번 열심히 일해보자."
그렇게 재무부(財務部)에 들어와서 횟수로 4년이 지나서야 국세청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 '74년도에 들어가 '77년 6월달에.
그러나 나는 그때 재무부에서 근무한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의 공무원 생활의 눈을 뜨게 해 준 곳이 바로 재무부이다.
나는 그 곳에서 우리나라 예산과 세수를 다루는 큰 일도 해봤고 국가를 위해서 정말 큰 일을 하는 동료와 상사들과 고락(苦樂)도 같이 해봤다.
나는 그곳에서 공무원 생활에서 어떤 난관과 큰일에 부닥쳐도 차분히 당황하지 않고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또한 승진소요기간(昇進所要期間)이 되자마자 6급으로 승진하는 행운도 얻었다.
그 곳에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고생하면서 근무한 직원들과는 정(情)또한 끈끈하다.
매년말이면 '세제동우회'에서 어김없이 건강하게 만나고 있다.
그때 상사로 동료로 고락을 같이 하던 분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윗분으로는 배 도, 최진배, 조중형, 강동구, 박경상, 임복빈, 최병윤, 박충식, 정덕구, 강만수, 서경석, 이석희, 민상기님이 계셨다.
그리고 고웅실, 김광현, 김창경, 김학수, 김홍정, 박인식, 오정근, 이덕희, 이성식, 이종규, 임종우, 장정태, 정병인, 정연호, 한기완님 등 나만 빼놓고 쟁쟁한 분들이 많았다.
그 분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재무부는 지금 '국세청' 앞 '문화부'자리에 '경제기획원'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밤 10시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다.
'이제국', '증보국' 등 다른 부서는 일찍이 퇴근하는데 유독 세제국만 그랬던 것 같다.
그만큼 일도 많았다.
국세청 출신들이 대부분이라 예의범절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인가? 윗분이 퇴근하지 않으면 일이 없어도 마냥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바로 뒷편에 있던 '진국설렁탕'집의 설렁탕이 우리의 고정메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