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살인(자살골)의 추억
세제국 근무시절에서 제일 기억나는 것은 매년 체육주간에 열리는 각 국실(局室)별 축구시합에서 내가 넣은 한골이다.
각 국실별로 엄청 경쟁이 치열했는데, 심지어 지방에 축구 잘하는 직원이 있으면 재무부로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대회가 있기 5∼6개월 전(前)부터 오후시간에는 선수들이 연습에 여념이 없다. 특히 은행을 감독하는 이재국(理財局)과 증권보험회사를 감독하는 증보국(證保局) 선수들은 축구팀과 구장을 갖고 있는 금융기관에서 자기들 잔디구장으로 모시고 가서 국가대표 코치가 조직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등 다른 국의 부러움을 샀다.
우리 세제국(稅制局)은 어떤가?
6개월전부터 연습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겨우 보름을 남겨 놓고 연습을 시작하는 데 장소가 없다. 인근 배재중학교 운동장을 겨우 빌려 맨땅에서 연습을 해봤자 하나마나 매 한가지다.
한번은 배재중학 선수들과 연습게임을 하는데 '15 대 0'으로 분패(?)한 적도 있다.
체육대회 당일.
우리의 첫 게임 상대는 막강한 증보국이다.
전·후반 각 20분씩 뛰는데 우리는 사전(事前)에 작전(作戰)을 면밀하게 세웠다.
나중에 국세청 차장을 지낸 '이○○' 사무관이 주장으로서 한번 더 작전을 지시한다.
"연습한 대로 무조건 바깥으로 땅볼로 차내라."
그의 포지션은 골키퍼다.
나는 좌측 윙을 보고 우측에는 세제실장을 지낸 '이○○'였고 '정○○'가 센터포드였던 것 같다.
우리는 공이 오면 무조건 바깥으로 차내면서 전반전을 잘 견뎌냈다. 하프타임에 '0 : 0'의 스코어에 고무된 우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전반은 우리 계획대로 잘 됐다."
"후반전에도 전반전과 같은 전술로 비기고 나서 승부차기로 가자."
누군가 기발한 작전이나 있는 것처럼 끼어들며 얘기한다.
"공격이고 나발이고 전부 우리 골문 앞에서 수비다!"
ㅋㅋㅋ 전술은 무슨…. 뭐 그런 놈의 작전도 다 있냐?
똥볼 내는 것도 전술이냐?
우리는 작전대로 우리 골대를 에워싸고 수비에 치중한 결과 후반 중반까지는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증보국'에서 코너킥을 찼는데 그 볼이 나의 머리위로 날라 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순간적으로 나는 똥볼 차는 연습만 했지 헤딩연습을 한번도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에라이 모르겠다.'
나는 눈을 감고 나에게 날아오는 볼을 펄쩍 뛰면서 이마로 받아버렸다. 나의 머리를 떠난 그 볼은 절묘하게 스핀을 먹고 골인이 돼 버렸다. 바로 우리 골대 안으로!
골키퍼가 손도 쓰지 못한 절묘한 헤딩슛이었다.
'헉! 큰일났구나! 자살골이다!'
증보국장님이 나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댄다.
자살골 한번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르리라.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남 보기 창피하고, 어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길로 우리는 내리 네골을 더 내주고 결국 5 대 0으로 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회식자리에서 차관보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어이 박○○! 국세청 나가고 싶으면 말로 하지 자살골은 왜 넣어?"
안 그래도 자살골 이야기가 나올까봐 가슴 졸이고 있는데….
나는 즉시 대답했다.
"차관보님! 세제국이 생긴 이래 한골 넣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하십시오!"
"자기 골에 넣든 남의 골에 넣든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바탕 웃었다.
국세청으로 전출된 이후에도 재무부에서 축구시합이 있는 날이면 누군가 꼭 한마디 한단다.
"그 자살골 넣은 친구 어디 갔어?"
"재무부에서 삼사년을 고생하고 그리 가는데 희망대로도 못해줍니까? 다시 보낼 태니 희망대로 해주시오" 라고 항의를 하셨다.
'헛 그참! 미치고 환장 하겠네….'
18. 좋다 말았다
"이번에 국세청에 나가는데 어디로 갈래?" 과장님이 물으신다.
"북부(나중에 효제세무서로 바뀌었음)세무서로 보내주십시오."
나는 이번 인사에서 국세청 전출을 대비해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국세청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북부세무서'를 추천했다.
"딴데로 희망을 하지, 이번에 같이 나가는 '한○○'이가 북부 간다고 미리 희망을 했어."
"둘 다 북부로 간다면 곤란하지 않겠나?"
나는 3년을 더 고생했는데 나의 의견을 먼저 묻지 않은 것이 섭섭했다. 그는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을지로가 괜찮다 하더라. 그리로 희망하지."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다. 그렇게 해서 나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을지로를 희망하게 돼 버렸다.
그 당시는 서울을 東·西로 갈라 서쪽은 '서울지방국세청'이 동쪽은 '중부지방국세청'이 관할을 하고 있었다.
북부와 을지로세무서는 모두 중부지방청 관할이었다. 우리는 중부지방청에 발령장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북부를 희망한 한○○은 남산서로, 을지로를 희망한 나는 북부서로 가는 발령장을 줬다.
"한○○씨는 북부에서 재무부로, 다시 북부로 나오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남산으로 했고, 박○○씨는 을지로를 희망했지만 6급 T/O가 넘쳐서 부득이 북부로 했다"라고 중부청 총무과장님이 설명을 해주신다.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역시 하늘이 알아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은 다시 재무부로 와서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각 과를 다녔다. 차관보님께 인사를 드리니 차를 권하며 말씀하셨다.
"어디로 갔지? 박군은 을지로를 희망했지?"
"네, 그런데 을지로는 6급 T/O가 없어서 북부로 가게 됐습니다."
"그게 뭔소리냐? 고생하다 가는데 희망대로 안 보내줘?"
화를 내시면서 당장 국세청장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부속실에 명한다.
나는 속으로 '큰일났다. 얼른 만류를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냥 두십시오. 아무데 가면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 이런 전례(前例)를 만들면 안돼!"하시며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국세청장님에게 강력하게 말씀을 하셨다.
'처음부터 저는 북부를 희망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려다가 그만뒀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서로 거기를 희망한 것을 알면 더 큰 오해를 하실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다.
"재무부에서 삼사년을 고생하고 그리 가는데 희망대로도 못해줍니까? 다시 보낼 테니 희망대로 해주시오" 라고 항의를 하셨다.
'헛 그참! 미치고 환장하겠네….'
나는 다시 중부청으로 갔다.
어느새 만들어 놓았는지 '을지로세무서'로 가는 발령장을 주고는 북부로 가는 발령장을 받아서는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77년6월1일자로 을지로에 가게 됐다.
이런, 좋다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