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송림화점 이사장
왕수발씨의 중국집 '오구반점' 바로 옆에 '송림화점'이란 등산화 전문점이 있다. 너무나 고지식하고 성실했던 70대 노인이셨던 이사장은 77년 당시에도 그곳에서만 50년째 등산화를 직접 만들어 팔고 있었으며 현재에도 그 자리에서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경영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수제 등산화라면 우리나라에서 그 집이 최고다.
그 당시 한자리에서 모자를 바꿔 쓰지 않고 계속 사업을 하다 보니 실제 매상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금액에 대한 세금을 내고 있었다.
그 당시 납세자들 사이에서는 소위 '모자 바꿔쓰기'라는 방법이 통용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자리에서 오래 사업을 하다 보니 '과세표준금액'이 누적적으로 올라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친척이나 종업원의 이름으로 명의를 바꾸면서 폐업, 신규를 반복해 세무서에서 책정된 과표를 신규로 위장해 처음부터 출발하게 하는 편법이다.
걸리면 작살난다.
그때 '송림화점'의 과표는 4억원쯤 됐는데, 실제 매상은 이 사장님의 '치부책(잡기장 또는 비망노트라 하는 것이 좋겠다)'에 꼼꼼히 적혀있었다. 정확히 2천735만500원이었다.
이 사장님은 한푼 속이지 않고 정말 이것밖에 안되는데 담당에게 사례를 안해서 그런지 자꾸 올린다고 세무서를 원망해댄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라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나에게 건네준 치부책, 나는 그렇게 깨알같이 진실을 적어 놓은 장부를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그 당시에는 세무서마다 전년도의 외형을 기준으로 매년 몇십%씩을 올려서 각 동별 담당자별로 다시 배정을 하는데 동별 담당자는 그 금액을 맞춰내야 했다.
각 담당자들은 그 금액(配稅額이라 했다)을 한푼이라도 적게 받으려고 과장, 계장, 심지어 서장에게까지 로비를 했다. 그래서 한사람 납세자의 과표를 줄이려면 다른 납세자의 그것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과장님 진짜 장부 함 보실래요?"
나는 송림화점에서 가져온 이 사장님의 수첩같이 생긴 '치부책'을 과장님에게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진짜 세무공무원 만났다'고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던 사장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것이 바로 공무원의 작은 보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작은 보람이 26년후에 다시 '큰 보람'으로 내 앞에 다가오게 된다.
"이게 바로 그 장부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진실된 장부는 처음 봅니다"하면서 동의를 구하듯이 과장님을 쳐다 본다.
맘씨 좋은 계장님이 "뭐가 그리 심각하냐"하면서 가까이 오셨다.
나는 두 분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설명을 드렸다.
"한곳에서 자기명의로 50년을 하다 보니 실제수입의 무려 15배를 지금까지 내면서 우리를 원망하고 있습니다"하면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로잡아줘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나는 과장·계장 두분의 어깨를 번갈아 안마를 해드리며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나는 이제까지 누구에게 그렇게 아양을 떨어 본 적이 없다.
"알앗써!"
그리하여 송림화점의 수입금액은 4억원에서 2천735만500원으로 '치부책'에 적혀 있는 금액 그대로 조정하게 됐다.
'진짜 세무공무원 만났다'고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던 사장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것이 바로 공무원의 작은 보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작은 보람이 26년후에 다시 '큰 보람'으로 내 앞에 다가오게 된다.
21. 큰 보람
그로부터 26년후 2003년 초봄, 어느 일요일 날이었다.
나는 집사람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이제, 골프고 낚시고 다 치우고 그래도 건강에는 등산이 최고다.'
'앞으로 매주에 한번은 산에 가자' 는 등 그런 얘기였다.
그래서 등산화를 맞추려고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 반신반의하며 26년전에 내가 담당했던 등산화 전문점 '송림화점'을 찾아 나섰다.
옛날 그 장소에 도착해 보니 '송림화점'과 그 옆에 '오구반점'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가게의 규모도 그대로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강산이 두번하고도 반이나 바뀐 지금, 그들은 나를 절대 몰라볼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시간이라 우리는 먼저 저녁을 먹고 송림화점으로 가기로 하고 '오구반점'에 들어갔다.
"어! 어! 어! 바아악형!"
그 왕수발씨가 26년 전의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 보이는 그의 눈빛이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도 할머니가 돼 있었다.
두분 모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왕수발형!"
나도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박 형! 어떻게 내 이름을 기억해?"
"그런데 왕 형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나는 그때까지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를 듣고는 나는 더욱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내는 정말로 나를 존경하게 됐다.
그는 엄지와 중지 두개의 손가락을 모아 동그랗게 동전모양을 그리면서 말했다.
"우리 담당 전부 이거 먹었다 해!"
"박형! 안 먹었다 해!"
"그래서 내 기억한다 해!"
그날 저녁 우리는 시키지도 않은 처음 보는 중화요리를 배가 터지도록 얻어먹었다. 음식 값을 내려 하니 화를 막 낸다.
등산화를 사러 왔다고 하니까 자기가 가서 소개를 해 준단다.
저녁을 먹고 나서 왕 형과 같이 '송림화점'으로 들어갔다.
"박 형 아이가!"
26년전 종업원인줄 알았던 그집 아들 이씨가 사장이라며 나를 알아본다. 왕 형이 소개도 하기 전에.
영감님은 타개하신지 오래 됐다고 했다.
나와 아내의 발을 재면서 험한 산에 갈 때와 낮은 산에 갈 때의 신발이 다르기 때문에 두 종류의 등산화를 각각 맞추란다.
계산을 하려 하니 극구 받지 않는다.
그러면서 왕 형과 이사장은 마주보며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박 형, 아버님 살아계실 때의 은혜를 못 잊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박형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 뭔가 진한 감동이 나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을 간다고 슬며시 사장 방을 나와서 진열해 놓은 등산화속에 얼마 안되는 돈을 슬쩍 넣어뒀다.
맞춘 등산화를 며칠뒤 집으로 부쳐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들과 헤어졌다.
오는 도중 차안에서 이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모자라지만 등산화 대금을 진열장에 넣어뒀다고 가르쳐 줬다.
만약에 돈을 넣어놓은 등산화가 팔리게 되는 경우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이다.
그들은 대기업도 아니고, 지극히도 일반적인 소규모 영세사업자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진정한 믿음과 땀냄새 나는 진한 사랑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공무원 생활의 보람을 실감하는 길이었다. 이것이 바로 '큰 보람'이 아닙니까?
아내가 슬며시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당신 참 대단해요"
정말로 기분 좋았던 일요일, 바로 Beautiful Sunday다.
보름뒤 송림화점 이사장은 등산화 네 짝과 그 돈까지 택배로 보내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