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계장, 빽 한번 써봐" (15)

2006.12.29 08:56:08

창간 41주년 기념 기획연재 박찬훈(朴贊勳) 전 삼성세무서장

 

22. 친절의 후유증

 

출장을 갔다 조금 일찍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사무실 입구 출입문에서 어떤 아가씨가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뭔가 몹시 급한 일이 있어 담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친절이 몸에 베여 있고, 습관이 돼 있는 나는 그런걸 보면 또 참지를 못한다. 사실은 그 아가씨가 아주 예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가씨,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업자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그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듯 반가워하면서 말했다.

 

그 아가씨는 산림동에서 인삼찻집을 내일 개업하는데 전화가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화국에서는 '사업자등록증'을 가져오면 즉시 전화를 설치해 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전화회선이 귀했던 그 당시에는 전화선을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 아가씨는 산림동 담당이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담당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사업자등록을 신청해도 법정처리기간 7일을 훨씬 넘겨 처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곧 담당이 올테니 잠시만 더 기다려 보세요."

 

그리고 의자를 권했다.

 

그런데, 퇴근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

 

나는 직접 '사업자등록신청서'를 써서 접수하고, 대장에 등재하고, 얼른 결재를 받아, 사업자등록증에 관인을 찍어 내줬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 간단한 업무를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일주일이상 질질 끌면서 급한 납세자를 애먹이지 않았나고 반성하면서….

 

이름이 '김○○'이고 상호는 '○○찻집'이다.

 

아가씨는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녀는 내 책상서랍을 열더니 흰 봉투를 얼른 집어넣고는 황급히 나간다.

 

감찰직원은 그때까지 내 책상위에 놓여있는 작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아가씨! 이게 뭐요? 함 뜯어봐요."

 

 

출입문을 밀고 반쯤 나가고 있는 그 아가씨를 나는 큰소리로 불렀다. 그리고는 아가씨를 옆에 두고 나는 알아듣도록 일장연설을 했다.

 

"아가씨! 이 책상은 누구 책상이요?"

 

"주인 허락도 없이 함부로 책상을 열어도 돼요?"

 

"그리고 이 봉투는 또 뭐요?"

 

"어디서 이런 못된 버르장머리를 배웠어요?"

 

"…."

 

나의 사정없는 질책에 아가씨는 얼굴이 붉어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사하는 친구가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이것 봐요 아가씨! 이 봉투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모르겠으나, 인삼차를 몇잔을 팔아야 이 돈이 되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인삼찻집이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헤프면 됩니까? 또순이처럼 열심히 하세요!"

 

"그래서 성공해서 벤츠를 타고 와서 그때 돈 많이 주시오."

 

"그때 가서 적다 싶으면 내가 더 달라 할 테니. 알았어요?"

 

"…네."

 

"가보세요."

 

그 아가씨는 내 말에 분명히 어떤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아가씨가 나를 다시 찾아오게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 3년뒤 추석이 내일 모레로 가까워 올 무렵이다.

 

나는 그때 을지로서에서 남대문서를 거쳐 중부세무서 부가2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아가씨가 다가오면서 인사를 한다.

 

"누구신데요?"

 

나는 처음에는 누군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무척이나 반가워 하던 그 아가씨는 바로 3년전에 인삼찻집을 시작했던 바로 그 아가씨였다.

 

어떻게 벌었는지 종로, 을지로, 남대문 쪽에 규모가 큰 다방을 세개나 운영하고 있었으며 정말로 벤츠를 몰고 왔다.

 

"저 벤츠 샀어요!"

 

"그때 정말 고마웠습니다. 잊지 않고 있어요"하고는 추석선물이라면서 조그만 상자를 책상위에 놓고는 만류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나가버렸다.

 

그런데, 나간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아가씨는 추석을 전후해서 암행감찰 나온 감사원 직원과 함께 내 자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큰일났구나!'

 

나는 난감해 하고 있는데 감사원 직원은 그 아가씨와 나에게 확인서를 쓰라고 재촉한다. 그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같았고, 아가씨는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처럼 한번만 봐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기가 막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감찰직원은 그때까지 내 책상위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아가씨! 이게 뭐요? 함 뜯어봐요."

 

여자가 화나면 정말 무섭다는 것을 나는 그날 실감을 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상자를 쥐어 뜯는다.

 

그런데 그 상자 안에는 아가씨가 직접 손으로 뜨개질한 조끼가 들어있었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이것 봐요! 당신들도 공무원이라면 여기 박 선생님 본(本)을 좀 보셔요! 사실 나는 여기 중부세무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을지로세무서 관할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하면서 3년전에 사업자등록을 할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아직도 그때 내가 한 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급한걸 알고 담당도 아니면서 신청서까지 직접 써서 사업자등록을 해 주셨어요. 이분이"

 

"고마워서 사례를 했더니 인삼차 몇잔 팔아야 이 돈이 되냐면서 헤프게 쓰지 말라 하셨어요."

 

"그리고, 돈 벌어서 벤츠타고 와서 그때 주라 했어요."

 

"나는 정말로 그 말을 명심하고 열심히 살았어요."

 

"이 선물은 내 정성과 고마움을 담아 제가 직접 뜨개질한 겁니다."

 

"이게 뭐 잘못된 겁니까?"

 

감사원 직원도 이해를 하는 것 같았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옆의 을지로세무서에 가서 아가씨의 세적(稅籍)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박 계장님 미안합니다. 아가씨! 잘 하셨어요. 미안해요."

 

나는 작은 창피를 당했지만 또다른 '큰 보람'을 느꼈다. 우리 직원들은 애인이 멋쟁이라고 수군수군거린다.

 

'예끼! 이 사람들아 생사람 또 잡을 일이 있나?'

 

그런데 문제는, 그 조끼가 어쩌면 내 몸에 그리도 딱 들어맞는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계속>

 



세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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