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702호에 살고 있는 군에서 제대한 아저씨의 퇴직금을 누나가 몇달전에 꿔 갔단다. 나한테는 비밀로 하고.
다음달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데 어떻게 갚을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긁어 모으고 친구에게도 빌리고 해서 사기(詐欺)로 몰리고 있는 어음건을 일단 해결을 했는데 문제는 옆집이다.
결국 집을 담보 잡히고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월급 타서 이자 갚고, 애들 학원 중단하고, 친구에게 빌려 생활하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 시작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형은 나 말고도 아버님 집과 시집간 여동생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았는가 하면, 은행 다니는 동생 명의로 신용대출을 받아가는 등 한마디로 처가(妻家)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형은 지금까지도 어렵게 살고 있다. 경우가 바르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돈 앞에선 항우장사가 따로 없는가 보다.
누구는 회사돈 빼돌리고 고의로 부도를 낸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친척과 친구 사이의 돈거래는 결국 원수가 된다는 말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자형 내외와는 서로 왕래하며 친밀하게 잘 지내고 있다.
상처를 줄까봐 처갓집에서는 누구도 그 앞에서 돈얘기를 끄집어 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인지 자형도 지금까지 피해를 입힌 가족에게 단 한마디 사과의 말이 없다. 조금은 섭섭하다.
아마, 엄청난 실수와 잘못을 저질러서 할 말을 잊은 것 같다.
이런 사적(私的)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여러분도 이러한 경우를 당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한에는 비록 아버지라 해도 아들이라 해도 돈 만큼은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무는 물론, 어떤 개인적인 일이라도 계장님과 상의하고, 과장님과 의논하고, 서장님께 물어보라고 권해드립니다.
적은 월급에 남의 빚으로 시달린다면 업무는 물론, 아무것도 잘 되지 않습니다.
35. 실패와 좌절
지방청에서 연락이 왔다.
올해 사무관 특별승진(特別昇進) 시험에 잘하면 대상이 될 것 같으니 시험준비를 해두라는 반가운 연락이었다.
반갑기는 했으나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시험날까지 불과 몇달 남지 않아 우선 시간이 촉박하였고,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형의 빚정리에 시달리고, 쪼들리고, 한창 수습할 때였기에 공부할 틈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큰일이다.
그 당시 특별승진 시험과목은 1차에 객관식으로 헌법(憲法)과 국사(國史), 2차에 주관식으로 행정법(行政法)과 회계학(會計學)을 치르게 돼 있었다.
대부분 준비생들은 종로에 있던 공무원시험 전문학원인 '행정고시학원'에서 비싼 수강료를 내고 다니는데 나는 그 당시 형편으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작년에 합격(合格)한 선배님이 쓰던 책과 노트를 빌려서 근무시간 중간 중간에 짬을 내어 공부를 하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서장님의 배려로 옥상에 있는 예비군 사무실을 이용하니 좀 나아졌는데 무척이나 더웠다.
공부할 시간은 짧았으나 학교 다닐 때부터 나의 주특기가 바로 '벼락치기'가 아닌가? 자신은 있었다.
나는 우선 1차에만 주력했고, 2차는 한달간의 여유기간을 활용하기로 작전을 짰다.
그런데, 그 족집게가 문제였다.
차라리 끝까지 나 나름대로 공부할 것을…. 나중에 후회(後悔)하게 된다.
헌법은 제정과 개정이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국사는 허구한 날 당파싸움과 외부로부터 두들겨 맞는 선조들을 배우려니 몹시 짜증이 났다. 그럭저럭 1차는 합격했다.
자아! 이제 벼락치기 2차 준비다.
행정법과 회계학이다. 답답하니 할 수 없다.
시험일이 임박해서는 고시학원에서 족집게 유명강사로 소문난 '송○○' 박사에게 특강도 받았다.
그런데, 그 족집게가 문제였다.
차라리 끝까지 나 나름대로 공부할 것을…. 나중에 후회(後悔)하게 된다.
2차 시험당일 장소는 명지대학교이다.
1교시는 행정법 시간이었다.
옛날의 과거시험을 치듯이 두루마리 종이에다 붓글씨로 길게 쓴 시험문제를 칠판에 붙이고 시작종이 울림과 동시에 내려트리는데 제목을 보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헉! '공용제한에 대하여 쓰시오' 50점짜리다.
행정법에는 총론(總論) 부분이 약 80%, 각론(各論) 부분이 약 20%로 구성돼 있는데 그 '족집게강사'가 각론 부분에서는 절대로 출제되지 않는다고 장담을 한다.
나는 "각론에서 안 나온다는 법(法)도 규정(規程)도 없잖습니까?"하고 물었다.
"괜히 시간낭비 마시오. 내가 보장합니다."
그 바람에 그에게 배운 모든 사람은 행정법 교재의 '각론부분'은 아예 잘라내 부피를 줄이고, 오로지 '총론부분'만 공부했다.
문제를 보는 순간 그 족집게 송 박사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총론은 족집게님이 감탄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는데 출제(出題)는 각론에서 나와 버렸으니….
열장으로 된 답안지 매수(枚數)만 세면서 십여분을 그냥 보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총론에 있는 손실보상을 위주로 답안지를 채워 버렸다.
나머지 단답형 문제는 총론에서 '공법상 계약'과 '조건부 행정행위' 두 문제가 나왔는데 그건 자신있게 썼다.
점심시간에 지방청 인사계에 근무하는 '이 형식'씨가 격려차 응원을 나와 설렁탕을 사주는데 도대체 먹을 수가 없었다.
오후에 치룬 회계학 문제는 '우발채무'가 50점짜리였고 나머지는 '외화부채조정', '이익준비금', '계속기업공준'이었는데 정말 잘 쓴 것 같다.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왔다. 기대는 안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으나 결과는 뻔했다.
족집게에게 배운 사람 대부분이 불합격이었다.
나는 행정법에서 39.0 회계학에서 95.5 평균 67.25로 합격점수 60점은 훨씬 넘겼으나 행정법이 과락(課落)이라 낙방을 하고 말았다.
송 박사는 자기의 실수에 대한 충격과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등창이 터졌다면서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박 형에게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장문의 편지 두 장을 보내왔었다.
나는 문병(問病)을 갔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저희를 고의로 낙방시키려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위로를 해드렸다.
이번 시험에서 실패와 좌절의 제일 큰 원인은 송 박사의 족집게 실수, 자형의 부도로 인한 시간부족과 분위기 엉망, 자만심, 게으름 등등 이 겹친 당연한 결과이었다.
나는 이번 실패에서 '게으른 공부'와 '요행을 바라는 공부'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