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촌놈 출세하다 - 런던에서 한 달간
'전국교관 강의대회' 입상에 따른 부상으로 주어진 해외연수는 나에게는 큰 영광이었고 촌티를 벗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요즈음에는 여권만 달랑 들고 마치 화장실 드나들듯이 쉽게 오가지만, 그때 만해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런던대학교에서 연수도 받고 주말을 이용해 관광도 다녔습니다. 저는 귀국한 후에 그때의 기억을 기행문으로 써서 '국세지'에 상당 기간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처음 쓴 글이라 서툴렀습니다만은,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연재했던 내용을 간추려서 여기에 몇 가지만 다시 실어보기로 합니다. 지루하더라도 양해바랍니다.
<필자주>
(1) '85년6월14일
이 날은 40여년을 지내온 나의 생애에서 아주 특별한 날이다.
해외라고는 고작 제주도밖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 우물 안을 벗어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정부 각 부처의 교육기관 종사자 21명을 선발해 보다 선진화된 영국의 행정관리제도와 교육기법 등을 4주간에 걸쳐 연수코자 출국하게 된 것이다.
우리 연수단은 경북공무원 교육원장 嚴○○씨를 단장으로 하고, 총무처 吳○○씨를 간사로 하여 체신부 潘○○, 전매청 金○○, 국립보건원 金○○, 내무부 金○○, 법무부 許○, 총무처 權○○, 충청북도 朴○○, 건설부 朴○○, 교육부 李○○, 감사원 李○○, 관세청 柳○○, 환경연구소 梁○○, 서울시 文○○, 산림청 鄭○○, 경찰청 金○○, 제주도 南○○, 농수산부에서 羅○○, 복지부 金○○여사, 그리고 국세청에서 나, 도합 21명으로 구성됐다.
…(중략) "지금부터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잘 보고, 잘 듣고, 잘 먹고, 건강하게 돌아오라" 김포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던 李·閔·朴교관님과 친구 이진우의 당부가 눈에 선하다.
밤 아홉시 정각 우리를 태운 KAL901 비행기는 캄차카 반도를 지나 알래스카를 경유해 파리까지 가게 된다.
거기서 다시 런던으로 가게 된다. 소련놈들이 일을 저질렀던 바로 그 길이라 섬뜩한 감이 든다.
(2) 팔불출(八不出)을 면하다
"박형! 그만 자고 일어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건설부의 '박준규'씨가 알라스카에 도착했다고 잠을 깨운다.
알라스카의 Anchorage 공항에는 약 한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온통 눈과 얼음뿐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불모지이며 Eskimo인만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푸른 강과 울창한 산림이며, 인구도 사오십만이 된다고 한다.
1867년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제정 러시아가 대대로 물려오던 조상의 땅을 단돈 720만달러로 복덕방에 내어놓았다.
5억평이나 되는 이 땅을 우리 돈으로 평당 14원으로 쳐서 미국에 Bargen-Sale해버린 이 땅을 두고 지금 소련은 통탄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어디 그들뿐이겠나? 우리의 투기꾼 아저씨 아줌마들도 그 땅을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과 1달러로 팔불출의 한 가지를 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동 한그릇 주이소" 무심코 튀어나온 사투리다.
엄단장이 마구 웃는다.
양도세 문제도 없을 것이고 자금출처도 입증하기 곤란하면 몇만평 팔아서 증여세를 내면 될 것이다.
도처에 금광이 산재해 있고 석유매장량도 100억 배럴이나 된단다.
거기에다 무진장한 수산자원, 울창한 침엽수림 등 자원의 보고라 하니 그때 땡빚을 내서라도 사둘만 했다.
군사적으로도 쓸 만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공항이 있는 앵커리지는 항공교통의 요충지로서 '세계하늘의 십자로'라고 하지 않는가?
3m나 되는 불곰 표구 옆을 지나니 공예품가게가 보인다.
목각 에스키모상은 우리네 농촌할아버지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의 언어와 생활풍습은 우리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하니 그네들이 우리의 후손임이 틀림없다.
…(중략) 마침 '우동1$'이라 쓰여 진 간판이 보이길래 '엄'단장님과 같이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팔불출을 면해보려고.
아파트 premium 붙여 팔고 출서(出署)통지 한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 2만원짜리 일식우동 한번 못 먹어본 사람 등을 팔불출이라 했다. 불과 1달러로 팔불출의 한가지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동 한그릇 주이소" 무심코 튀어나온 사투리다.
엄단장이 마구 웃는다.
"two cups please" 어색한 영어로 고쳐 말을 하는 순간, 주방장 아저씨가 말했다.
"경상도 분이시군요"
멀리 알라스카에서 우리 동포와의 첫 만남이었다.
(3) 소지품
알라스카에서 파리를 경유해 런던으로 가게 된다.
일행 중 누군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짐 보따리를 걱정한다.
사실 그 짐들은 항공사 측에서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에 직접 옮겨 싣는다는 말을 들었으나, 서울 출발후 지금까지 한번도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잘 따라 오고 있는지 궁금하다.
혹시 실수로 다른 곳으로 탁송하거나, 누군가 보따리 속을 뒤져 귀중품을 훔쳐가지나 않았는지 불안하다.
사실 나의 보따리의 내용물은 대충 이러하다.
큰 가방 하나와 작은 핸드백 하나, 화물로 부친 큰 가방에는 런던대학에서 행사때 입을 양복 한벌과 와이셔츠 하나, 넥타이 한개, 속내의 서너벌과 양말, 우산 한개, 구두 한켤레, 골초라서 솔담배 세박스, 의약품 몇가지와 맛김 한박스 등등이다.
그리고 진짜로 귀중한 것은 작은 손가방에 넣어 항상 들고 다닌다.
여권과 국내에서 1만6천640원에 가입한 종합보험증서, 외환은행에서 환전한 영국 돈 400파운드와 여행자체크 2천500$, 그리고 소형 카메라와 착실한 교인인 누나가 선물한 작은 성경책 한권, 메모지 등이 들어 있다.
워낙 심한 나의 건망증. 이번만큼은 실수가 없도록 신경 많이 쓰자.
특히, 여권이 든 작은 가방을 잊어버리면 집에도 못 간단다.
정신 차리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