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상-세무사와 감사원장의 연봉

2000.02.10 00:00:00

이 정 호 세무사

사람이 나이 먹어 `이 정도면 됐다'라고 느껴지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얼마나 갖느냐는 나름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졌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배고픈 사람 껄떡거리듯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더 먹겠다고 동분서주하는 것을 본다. 글쎄, 얼마나 더 채워야 메워질지 한편 걱정스럽고 불쌍하다. 느껴지는 것은 나름대로 판단이겠지만 감사원장 연봉이 7천2백만원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의 경우 공무원연금 월1백만원과 세무사수입까지 합하면 다 털고 월 5백만원, 감사원장인 셈이다.

거래처에 친절하고 여직원 4명과 함께 다섯 식구가 가족처럼 지내면 된다. 그렇다면 마음편한 감사원장이다. 그러나 진짜 감사원장은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는가!

`권력' 크고 작고간에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니고 낙차가 클수록 충격이 크다는 것만 남는데, 더불어 사는 세상에 독불장군이 없는 것은 그 많은 사람 숲을 갈 지(之)자로 지나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정도면 됐다'가 되기까지는 많은 만남 중에서 생(生)에 가르침을 준 분들을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해병대에 입대했다. 19살부터 만 3년간은 휴전직후여서 정말 어려운 군 생활로 배고픔을 알게 됐으나 육체와 정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제대후 첫 직장으로 당시 서울 일간신문사 전무(4·19혁명후 감사원 감찰위원 작고)로 계시던 숙부님의 도움으로 신문사에 입사하게 됐다.

“국장님, 업무국 이정호입니다.”
“내일부터 머리에 기름 바르고 나왓.”
교복을 벗자마자 양복을 입은 터라 옷과 머리는 따로놀은 것이 국장님 눈에 거슬린 것이다.
동네 이발소에서 연탄집게 같은 것을 발갛게 달궈 고대하고 포마드 바르고 출근하니 전무실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명함 한 통을 내 주면서 이것 가지고 소공동, 을지로 큰 회사에 다니면서 구독세일을 하라는 것이다.
“네”
명함은 처음이지만 섭섭했다. 앉아 사무나 볼 줄 알았는데 신문배달도 아니고 신문 봐달라고 사정하러 다니라니.
“미스터 리 안 나가고 뭐해.”

꽤 소리가 큰 국장의 호령이다.
명함 한 통을 주머니에 넣고 시청앞으로 걸어 나오는 동안 `돈을 번다는 것', `야간대학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것', `내 스스로 숲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 등을 생각하다 반도호텔 2층 무역회사 사무실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으리으리한 사무실. 입구의 여직원이 “뭐예요.”
“신문 좀 봐 주세요.”
명함 한 장 놓고 도망치듯이 나왔다.
이마에는 땀이 나고 1개월 동안 명함 두 통이 없어졌으나 구독신청은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배운 것이다. 영업술이다.

처음은 여직원, 다음은 과장으로 이어지면서 상대와의 대화가 길어지고 낮은 자세에서 사람을 대하는 중요한 방법을 터득했고, 중요한 공부는 1개월에 끝났다. 그리고 업무국 광고 수금원이 된 것이다.

신문사 운영비의 70~80%에 해당하는 것은 광고수입이다. 당시 편집국장 월급과 같은 수준의 급료를 받으며 아무 사고없이 정직하게 돈 받는 기술을 배웠고 살아오는 동안 생각과 행동에 좋은 길잡이를 얻었다.

4·19혁명 당시 숙부이신 신문사 전무님은 감사원 감찰위원으로 가게 되고 그 해 말 새로운 진영이 들어와 신문사를 그만 두었다.

대전 검사장으로 있던 매형(현재 변호사)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빨리 대전으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대전세무서에 가봐.”
신문사 그만두고 20일만인 '61.1.21字로 대전세무서 사세서기로 발령이 났다. 매형은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직업의 진로를 정해 준 것이다.

발령나고 처음 출근한 곳은 총무과 정리계로서 직원은 거의 30대후반에서 40대초반인데 계장이 “이 주사 여기 앉으시오”라고 하여 직원 틈에 앉았다.

주위를 보니 전부 선배같고 힐끔힐끔 보는 눈이 어색해 옆에 있던 40대 초반의 선배에게
“잘 부탁합니다.”
“아니에요.”
“저 집집마다 다니며 세금 받습니까?”
“아닙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저리 가버려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임시직원이었다.
당시 사회는 정규직원과 임시직원이 엄격히 구분되었고, 철저한 공무원 계급사회인 것을 알았다. 총무과장은 “이 주사 재정보증인 두 사람을 세워 여기에 적고 인감증명을 붙이세요.”라 했다. 그러나 지금도 보증인은 허락받기 어렵다.

더욱이 당시 세무공무원 중 먹고 뛰는 친구가 많아 보증인 구하기가 어려워서 고민끝에 명동에서 증권회사를 경영하시던 하시던 외숙(현재 보험회사 회장)집에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는데 선뜻 도장을 내 주시며 “지금까지 인감계를 한 번도 낸 적이 없으니 네가 가서(당시 구청) 인감계 내고 증명 만들어 찍고 가져오거라”며 말씀하셨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 믿어 주셨는데 만의 하나 실수가 있으면 안된다는 것. 세무공무원 20년7개월동안 숙부님의 인감도장은 문서에 도장찍을 때마다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보증인은 외숙과 대전검찰청 수사국장 두 사람의 든든한 사람 때문에 대전세무서 근무 6개월만에 주사가 하는 현금취급 수납주임이 됐다. 한 분은 살아가는 데 처세와 근면을, 한 분은 진로를, 한 분은 정직과 성실을 가르쳐 주셨다


박정규 기자 inf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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