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콩트릴레이-① 할아버지와 비행기표

2001.09.03 00:00:00


장대같은 비가 억시로  흩뿌리며  쏟아부어 예정된 봄 체육행사는 빗속에 강행군일 수밖에 없었다. 금정산성의 막걸리도 마다하고 공항에 나갔으나 비행기도 결항되어 다음날 이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이 할아버지? 전주에 업무차 출장갈 류씨는 자의반 타의반(부친 건강 위문차 벌써 군산에 가려고 계획되어 있었음) 비 갠 다음날 김해공항에 2시5분 출발예정을 1시간쯤 남겨 두고 도착하여 공항내 1평 남짓한 흡연실에서 `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웬 주름진 얼굴의 칠순 할아버지 한분이 손에 서류 몇 장을 쥐고 다가온다.

“저어……” 하면서 무언가 말을 붙이려 한다.

“저어……” 파리하고 초췌하며 불안한 점이 역력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류씨는 “왜 그러세요?” 묻는다.

할아버지는 손에 쥔 서류를 중요한 듯 경계하며 조금씩 보이며 손을 떤다. `정부에서 부재지주(不在地主) 찾아주는 기간이 6개월인데 기간이 다 되어 간다. 일정(日政) 때 부친이 아무 아무개로 창씨개명되어 있는 강서구 어느 땅인데……구청직원이 서류 뭐 해 오라던데……제적등본을 보면 되고……LA에서 온 지 몇 달 되는데……'라며 뭔진 몰라도 상속물건을 찾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내가 국세청 재산세과에 근무해서 몸에서 그런 류의 상담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보이나? 20년 근무하다보니 공무원 냄새가 나나? 주변에 누가 저 사람(?)에게 가서 물어 보라고 일러줬나?' 이런 잠깐의 생각에 `내 모습을 누가 몰래 훔쳐보았나?' 흠칫하기도 했다.

“그래서요?” 물음에 할아버지는 서류를 이것저것 꺼내기도 하고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는 빈손을 보이며 무엇이 없다는 듯한 표정도 짓고 하며 하는 양이 요즘 IMF시대 신종 사기수법(?) 같기도 하여 한편 `내가 겉으로 보기에 대상(?:밥)이 되었나?'하는 기분 나쁜 생각이 들기도 하여 조금전에 생각했던 20년 공무원상은 갑자기 흔들리고 이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었다.

짧은 시간에 명암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가 있구나를 생각했다. `아! IMF가 과연 무섭기는 무섭구나.' 그러나 칠순의 할아버지는 입에서 무슨 약 냄새(병원 특유의 기분 나쁜 냄새)를 가볍게 풍기며 “젊은이!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급히 서울에 가야 되고……도와주게” 하신다.

이상하다. 조금전만 해도 내가 사기대상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상해 피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울음섞인 듯한 표정을 진지하게 지으며 도움을 청하니 `그게 아닌가? 내가 너무 IMF를 내 편리한 대로 우리 편으로 우호적으로 생각했나?' 잠시 부끄러웠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뵈러 고향에 가는(출장업무는?) 내가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다른 할아버지의 도움을 외면하기 위해 깡드쉬도 내 편인 양한 것같이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할아버지 이리로 오세요. 비행기표 제가 끊어 드릴께요. 나중에 형편 되시면 갚으세요.”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드리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쉬니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공기를 들이쉬지만 내가 들이쉬는 것은 틀린 것 같은 나만의 뿌듯함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것도 없이 혼자서 느끼며 길게 토한다.

아시아나 항공권 발매대 앞으로 간다.

“젊은이! 지금 바로는 못 가네. 여권도 잃어버려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하고 가야되니 돈으로 줘.”(조금전 신선한 공기가 또 탁해지는 것 같음을 느낀다)

“그러세요. 잠은 어디서 잤어요?”

“응, 부산역 앞 싼 하숙집.”(여인숙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요 저는 곧 출발해야 하니까 5만원 드릴테니(서울요금은 4만5천원 정도였다) 잘 가시고요 경찰서 왔다갔다 하려면 식사라도 하셔야지요”하며 1만원을 더 드렸다. 연락처를 알려달라 해서 명함을 드렸다.

급해서 그런지 아니면 나를 빨리 피하려고 하는지 가볍게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고 황망히 아래층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신다.

“역시 그랬구나, 아! 이 세상이 깡드쉬 땜에 인륜이 부서지고 있구나. 아니야, 아깝지 않아. 할아버지가 오죽 돈이 필요했으면 그랬을까? 잘했어. 우리 아버지께서 그런 상황에 누군가에게 오륙 만원 얻어 쓰실 수도 있겠지. 버린 게 아니고 내일 모레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을 대신 저분에게 사드린 거야”하고 씁쓸히 비행기에 올라 탔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행기 창 밖의 뭉게구름에 날려보내며……(어버이날 다음날) 출근을 한다.

“류 주사님 전화 왔습니다.”

옆 짝지 장지무씨가 전화를 건낸다.

“나요. 요일 전 공항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요……” 아직까지 기분 좋은 세상일 수가 있겠다.

-전주·김제지역 출장을 다녀와서


류 생 규 김해세무서



장희복 기자 inf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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