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隨筆]친구이야기18(사랑의 노래) 上

2002.08.26 00:00:00

이운우 경주署


가 다녀간 것일까? 평소 지저분하고 썰렁한 자취방이 오늘따라 훤하게 청소와 정리정돈이 되어 있고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밥 냄새가 풍겨나고 한쪽 구석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하얀 쌀밥 두그릇과 깍두기 김치에 카레라이스까지….

그리고 책상 위에는 예쁘게 접힌 쪽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To 석 ― ·
못 보고 뒤돌아 가는 모습 상상 좀 해 봐…
그리구 왜 자꾸 피하는데?
집안 사정은 대충 들었어. 가난은 죄가 아니잖아…
젊어서 하는 고생은 먼 훗날 값진 인생경험이라는데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   
-못난 희야가
PS:얼마전 가사시간에 배운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봤는데 싱그운지 짠지 모르겠네. 아무튼 내 성의로 생각하고 맛있게 드시길…
그리고 오늘 저녁 8시에 첨성대 앞에서 기다릴게 꼭 나와 줘.
물어 볼 말이 좀 있어.

조금전 들어올 때 마주친 주인 아주머니가 슬슬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지만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학생! 아까 웬 여학생 둘이가 와서 방청소에 빨래까지 다하고 연탄 불 피워 밥을 해놓고 가는 모양이든데 누구고? 참 참하고 이쁘드라…"

정말 부엌에는 쌀을 한 봉지 싸다 놓고 밑반찬까지 두어가지 마련하고 구석에 처박아 놓은 밀린 빨래까지 해 놓고 간 모양이었다. 

연탄불 안 피운 지 보름이 넘었는데….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가 났다. 놀라움과 고마움,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그 애가 다 들여다 본 것에 대한 수치감도 생기는 것 같고. 

'기집애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즈이 오빠와 약속까지 했는데 어떻게 남의 집을 알고 찾아 왔을꼬?'

흔히 말하는 '가정교사 구함'의 벽보나 전봇대의 구인광고를 보고 오후 내내 돌아 다녔지만 대부분이 명문출신 대학생이상이어야 되며, 더군다나 고등학생은 곤란하다며 모두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울에서는 유신헌법인가 뭔가를 만들어 삼선개헌문제가 나돌자 여야 정치권은 맨날 서로 헐뜯는 싸움으로 조용한 날이 없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데모와 시위로 대학교는 휴교하는 날이 많아지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려는 대학생이 남아 돌아가는 시대에 고교생의 과외 아르바이트 일자리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한곳은 입주하여 자기 아들 공부를 봐 달라고 했다. 하지만 혼자라면 몰라도 동생과 자취생활을 하는 처지에 혼자서 쌀밥과 고기반찬으로 배를 채울 수가 없지.

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화빵을 파는 포장마차 앞에서 한참 망설였다. '이 돈으로 국수나 라면을 사면 이삼일은 때울 수 있는데…' 하지만 지난 일주일째 아침 저녁으로 라면과 국수로 끼니를 해결하고 점심은 학교에서 친구 도시락을 나눠먹는 것으로 대충 때우고 했지만 꽁보리밥 도시락을 말없이 싸가지고 등교하는 동생에게 형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어 큰 맘 먹고 몇 백원어치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하루아침에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과 빚 청산 등 집안의 몰락이 도저히 믿기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로 다가왔다. 학업을 중단해야 될 아니 그것보다 당장에 일용할 양식 걱정을 해야 될 처지까지 되었으니.

녁 여덟시가 가까워 오자 갈등과 망설임으로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며 안절부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까지 해놓고 지금에 와서 약속을 깨어?'

한편으로는 인적이 드문 밤에 벌판에서 나타나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그 애가 눈에 선했다.

'지난번의 그 약속을 하지 말아야 했었는가?' 잠시 머리가 띵했다.


최삼식 기자 echoi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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