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오늘을 생각하며 - 콩과 콩껍질

2002.06.03 00:00:00

박덕규 서예평론가


역사의 흐름속엔 헤겔의 변증법적 요소가 있다.

중국역사의 줄기를 보면 요순의 정(正)의 천하가 있었고 춘추전국의 반(反)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한대의 합(合)의 치세가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다시 반의 국세가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속에서도 중국은 요순의 윤집궐중(允執厥中)의 법통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화(和)로써 모든 반목질시를 극복해 내는 슬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민족에게도 전이념인 제세이화(濟世理化)가 있다.

합리적인 사고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은 합리보다는 상극이 원리만이 존재한다.

타(他)를 치고 그 자리에 내가 서야 한다는 비합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사고 체계는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있디.

아니 그 도를 더해가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 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는 이 시점에서 재음미해볼 만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콩을 삶아 마실 죽을 만들고
콩을 걸러 먹을 즙을 만든다
콩껍질을 솥 아래서 불타고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다
콩과 껍질은 원래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는데
왜 서로 괴롭게 할까?

자기보다 영특한 동생 조식을 제거하기 위해 형인 조비(曺丕)는 조급성을 드러낸다.

일곱걸음 안에 시 한수를 짓지 못하면 극형에 처하겠다는 억지논리에 조식은 태연하게 위의 시를 완성하여 위기를 면한다. 역사의 흐름은 조급하게 당기려 해도 당겨지지않고 천천히 하려 해도 늦추지 않는 질서(疾徐)의 원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조비와 같은 생각으로 역사를 보는, 매우 미시적 관견(管見)만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상극적 사고로 조급하게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잃음이 있을 뿐이다.

니보어의 상보성의 원리처럼 자타의 공생을 통한 인간적 메카니즘의 순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조식이 던지는 콩과 콩껍질(콩대)의 상생원리와 조급한 욕심은 해악일뿐이라는 교훈을 새겨 봐야 할 때가 아닌가.


허광복 기자 info@taxtimes.co.kr
- Copyrights ⓒ 디지털세정신문 & taxtime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발행처: (주)한국세정신문사 ㅣ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17안길 11 (서교동, 디.에스 빌딩 3층) 제호:한국세정신문 │ 등록번호: 서울,아00096 등록(발행)일:2005년 10월 28일 │ 발행인: 박화수 │ 편집인: 오상민 한국세정신문 전화: 02-338-3344 │ 팩스: 02-338-3343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화수 Copyright ⓒ 한국세정신문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