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隨筆)]친구이야기 17(下馬碑)-말에서 내려라

2002.06.24 00:00:00

이운우 경주署


우기(雨期), 며칠째 내리는 장마빗속에 세상이 온통 습기에 젖어 마음마저 울적한 토요일 밤, 우산도 없이 시내를 쏘다니다가 돌아오는 길.

우산을 살 형편도 못됐지만 무엇보다 오기가 섞인 객기라고나 할까?

`비 맞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우산을 씌워 주겠지!'하는 막연한 기대로 비만 오면 우산도 없이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시청 앞을 지나자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도로변 플라타너스 밑에서 길을 건너려고 잠시 서 있었다. 길 건너편에 빨간 우산을 든 계집애가 이쪽으로 슬쩍 보면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누굴까? 무심코 길을 건너 집 쪽으로 가는데 빨간 우산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쪽샘 입구에서 큰길이 아닌 제재소 옆을 지나 미나리밭 사이로 빠지는 샛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고분이 밀집한 미추왕능 가는 길은 낮에도 인적이 드문데 비 오는 날 겁도 없이 혼자 가다니…….

거리가 6~7미터쯤 좁혀져 속으로 아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다를까 남의 속만 시커멓게 태우던 그 가시내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웬일로 이렇게 절호의 찬스가 다가오는가! 그애는 얼마쯤 앞서 가다가 갑자기 길옆 초가집 지붕 처마 밑에서 멈춰 섰다. 뒤따르던 石도 놀라서 멈칫 섰다. 잠시 혼란이 왔다. `그냥 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나칠 것인가, 먼저 무어라고 말을 걸 것인가?' 심호흡을 한번하고 일단 앞을 지나치는데, “ 얘! 우산 속으로 들어와, 비 맞으면 감기 들잖아”하면서 우산을 내밀었다.

마주치는 눈길엔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 비쳤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순간적으로 교차되었다.(아까 시청 앞에서부터 뒤따르던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깜직한 가시내……)

비에 젖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우산을 쓰고 가면서 서로가 말이 없다.

용기를 내어 첫마디를 꺼냈다.

“이름이 뭔데?”
“응, 그냥 〈희야〉라고 부르면 돼, 본인은?”
“나는 〈석〉이라고 해, 좌우지간 고맙다. 집은 어딘데?”
“(피-이) 고맙긴 뭘, 그런데 비 오는 날 왜 우산은 안 쓰고 다니는데? 지난번에도 우산도 없이 다니데……. 참, 우리 집은 요 앞 동네야, 댁은?”
“그냥 비 맞으면 좋잖아, 시원하고……”
“남학생들은 사춘기가 되면 우산을 안 쓴다던데 혹시……? 사춘기라 일부러 그러는 것 아냐?”

대답 대신에 石은, “지난번 〈별밤〉 방송에 엽서 보낸 적 있었지, 그것 듣고 내가 밤잠 못 잤다 아이가”

그 애가 킥킥 웃었다.

“내가 뭘 보냈는데, 잠 못 잤노? 머시마가 좀 희한하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니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비 맞았고, 지난번에는 니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집 쪽으로 가는 길은 벌써 지나쳤다.

미추왕능 앞에서 왼쪽으로 가야 되는데 비에 젖고 분위기에 젖어 이야기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 애도 집으로 갈 생각이 없는 듯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동네를 지나 인적이 없는 내물왕능쪽의 들길로 향했다. 초여름의 들판은 개구리 울음소리가 합창으로 메아리치고, 비는 걷기에 좋을 정도의 안개비로 변했다. 그 애의 조잘거림은 쉴새없이 이어지고…….

“취미는? 좋아하는 음악은? 좋아하는 위인은? 장래 희망은?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궁금한 게 많은 듯 이것 저것 물었다. 꿈속에서 구름 타고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 애는 헤르만 헷세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 `데미안'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팝송을 즐겨듣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했다.

石은 톨스토이의 `부활'과 생떽즈베리의 `어린왕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별로 없었다. 들길을 끝까지 걸어 첨성대를 지나 안압지로 갔다.

고즈넉한 연못 주위로 대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이자 어둠도 덩달아 더 짙어지고 그 애는 무서운 듯 어깨를 더 가까이 기대왔다. 연못을 한바퀴 돌아서 집으로 왔다.

미추왕능 앞 삼거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 애는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고 石은 괜찮다며 집도 어딘지 알고 싶으니 그 애 집 쪽으로 가자고 했다. 서로 주장을 내세우다가 그 애는 순순히 따랐다.

교리 최부자 어른 고택 돌담길을 따라 가다가 왼쪽으로 미추왕,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숭혜전 사당이 나오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를 지나서 길 가운데 서 있는 비석(下馬碑:옛날에는 그 길을 지나칠 때면 대·소 양반, 상놈,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높고 낮고 할 것 없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통과했던 곳) 바로 옆의 은행나무가 있는 기와집이 그 애 집이라고 했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 다음부터 친하게 지내고, 서로 연락을 취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길 저쪽에서, “야! 너거들 거기서 뭐하노, 짜식들 콩알만한 녀석들이 밤늦게 싸돌아 다니고……. 넌 임마! 누구야?”

그 애 오빠였다. 졸지에 꿀밤 한대 얻어맞고 애프터 약속도 못하고,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그 후 얼마 동안은 그 애를 통 보지 못했다.

石은 몇 번이나 그 집 주위를 서성이면서 그 애의 방이 있는 아래채에 불이 켜져 있을 땐 그 애를 본 것처럼 반가웠고, 불이 없을 때는 허전한 마음으로 외롭게 서있는 비석만 쳐다보다 발길을 돌리며 쓸쓸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허광복 기자 inf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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