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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3.29. (금)

[송년인터뷰]평생 세금쟁이의 '선한 영향력'…기적을 부르다

조용근 세무법인 석성 회장(석성장학회 회장, 석성1만사랑회 이사장)

 

국세청 개청(1966년) 멤버인 조용근 세무법인 석성 회장(前 대전지방국세청장·한국세무사회장)은 “국세공무원은 고귀하고 자랑스러운 직업”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나눔과 섬김’이라는 신조를 평생 실천하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부터 장학금 기부와 봉사활동에 앞장서 ‘밥퍼’ 청장님으로도 불렸던 그는 매년 2억원 이상을 기부하는 자산 30억원 규모의 '석성장학회'를 이끌고 있다. 중증장애인과 미얀마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모범 공직자상을 전파하는 특강도 수없이 나간다.

 

잘 베푸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무언가 받으면 그조차 나눈다. 국세청 재직시절 납세자로부터 받은 저금통 하나가 기부 인생의 계기가 됐고, 선친의 유산은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데 쓰였다. ‘석성’이라는 이름도 부모님의 이름 가운뎃자를 따서 밤을 지샌 고민 끝에 지었다.

 

남을 잘 돕는 이들의 두 번째 특징,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그 공도 다른 데 돌린다. 조용근 회장의 경우, “어디까지나 국세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답변 뿐이다. 국세공무원 출신이 세상과 사회에 유익한 일에 활약한다는 인식을 확산하고 싶다는 사명감이 드러난다.

 

38년6개월간 국세청에 몸 담은 인생 전반기가 ‘땀과 눈물이 녹아있는 쟁취의 역사’였다면, 인생 후반기는 오로지 ‘나눔과 섬김’에 바쳤노라고 그는 말한다. 나눔을 실천했더니 펼쳐진 기적에 대해, 지난 22일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세무법인 석성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어봤다.

 

 

9급 공무원, 흙수저도 ‘할 수 있다’

“어느 위치건 자그마한 실천이 큰 가치”

 

조용근 회장은 9급 국세청 공무원 출신이다. 국세청 출신인데 서울고등검찰청 신청사 앞에 떡하니 그의 얼굴이 청동조형물로 새겨져 있다. 누군가는 장학재단을 만들었다는 말에 “수백억대 자산가냐”고 묻는다. 그러면 조용근 회장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답한다. 또 누군가는 “진짜 국세청 출신이 맞습니까?”라고 묻는다. 세금 걷는 공무원이 기부에 나서는 모습이 익숙치 않다는 이구동성이다. 이런 질문에도 그는 “아니다. 잘못 봤다. 나보다 더 좋은 일 하는 국세청 사람이 많다”고 꿋꿋이 답한다.

 

“세무공무원이 뇌물 받아서 잘 살 거라고 수군대지만, 국세청에 가난하고 반듯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 회장의 반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마태가 그의 멘토인 이유이기도 하다. ‘세리(稅吏) 출신 마태’라고 소개하는 복음에서 조 회장은 자신의 길을 찾았다. 성경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세상에 빛을 비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처럼 국세공무원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 위상을 높이자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다.

 

거창한 시작도 아니었다. 차도 없이 통근하던 평범한 공무원 시절, 휴가 때면 버스를 타고 시골을 찾았다. 강원도 정선의 탄광에서 일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몸소 보여줬다. 그의 공무원 재직 시절 일대기를 담은 책 ‘나는 평생 세금쟁이’에 따르면, 부자여야만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 회장은 후배들에게 “너도 할 수 있어. 꿈을 안 꾸는 것 뿐이야. 왜 잠자고 있느냐”고 묻고 싶다고 한다. 2만2천여명의 국세공무원이 뭔가 뜻을 품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냐고 물었다.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역발상을 조 회장은 강조했다. “저는 요즘 말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형편이 어려워 대학도 채 못 마쳤다. 전쟁 시절, 들쥐고기 50마리를 먹고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왔다. 스무살 때 국세청에 들어와 지금껏 살아온 끝에 외치고 싶은 이야기는 ‘제발 안주하지 말자’는 것이다. 8급 출신이면 어떻고, 6급 퇴직하면 어떤가? 내가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되, 자그마한 것이라도 실천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역시 국세공무원은 다르다’는 품격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조언했다.

 

선친 유산 5천만원으로 시작한 장학재단이 108배로 성장

2005년부터 학생 2천200여명에게 장학금 24억원 전달 

장학사업 진정한 취지 알려지자 전국 방방곳곳서 기부 답지 

 

인생 후반일수록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하는 조 회장은 현재 재단법인 석성장학회를 약 20년째 이끌고 있다. 석성장학회의 기틀은 선친이 남긴 유산 5천만원으로 시작됐다. 1972년 어머니의 작고에 이어 12년 뒤인 1984년 부친이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구입한 300만원짜리 구의동 한옥집은 그새 6천500만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중 1천500만원으로 형편이 어려웠던 누나에게 아파트를 사주고, 나머지 5천만원을 주식에 투자했다. 10년 뒤, 5천만원이 4배 반인 2억2천800만원이 됐다. 이때 아내가 ‘그거 우리 돈 아니잖아’라고 한 말이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 무학자(無學者)인 부모님의 염을 담은 장학회를 만들자’고 이때 마음을 굳혔다.

 

1994년 당시 장학재단법인으로 등기하려면 3억원이 필요했는데, 딱 7천200만원이 모자랐다. 우선 임의단체로 장학회를 만들고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국세청 공보관 재직 시절인 2001년, 드디어 여비가 마련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서울 소재 신문사에 다니는 한 선배가 현대도시개발에 다니던 지인을 소개해 줬는데, ‘아버님 약값이라도 보태라’며 송파구의 아파트 상가 분양을 권유했다. 계약을 하고 이후 중도금을 내려는데 돈이 없었다. 그런데 중도금을 내야 할 시점에 아버지 상을 당했다. 아파트에서 직접 장례를 치러 장례비용이 들지 않아, 조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중도금으로 냈다. 한동안 정육점에 세를 주던 상가는 이후 1억700만원에 팔렸다. 여기에서 1억여원을 합쳐 2001년 장학재단을 정식 설립했다. 공직에 몸담고 있어 재단 이사장은 아내가 맡았다. 공직자가 현직에서 장학재단을 만든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후 조 회장은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2005년 공직 생활을 마쳤다. 일부 로펌의 콜을 마다하고 세무사 생활을 해보고 싶어 회계법인과 로펌을 같이 하는 곳에 3분의 1 출자금을 내고 참여했지만, 세무사를 대하는 태도가 뭐든지 한 수 아래였다. 세무사라는 직업에 누구보다 높은 자부심을 가졌던 조 회장은 후배들을 모아 독립을 결심했다. 비용을 혼자 전액 부담하며 양친의 이름을 딴 '세무법인 석성'이 이렇게 세워졌다. 정관부터 매출액의 1%를 석성장학재단에 기부한다는 규정을 만들었고, 이렇게 해서 모아지는 전국 지사 10곳의 연간 1% 로열티 7천여만원도 장학금으로 쓴다. 

 

5천만원으로 시작해 정식 장학재단이 될 때는 3억2~3천만원이 됐고 지금은 기본 재산이 30억원으로 대부분 현금성 자산이다. 여기에 2005년부터 2천200여명의 학생들에게 지급한 24억원의 장학금을 합치면 총 54억원 규모에 이른다. 5천만원이 54억원, 108배.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셈이다. “석성장학회의 역사는 내가 생각해도 한 마디로 기적”이라고 조 회장은 평했다.

 

석성장학재단이 보유한 30억원으로 가입한 보험 이자 4%에 해당하는 1억2천만원과 지사 10곳의 1% 로열티 7천만원,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기부금을 합치면 매년 약 2억5~6천만원이 마련된다. 석성장학재단은 이 돈을 미얀마 학교 건립에 5천만원, 인건비 등 비용 3천만원, 나머지 1억7천만원을 국내에 기부하는 투명한 구조로 운용되고 있다.

 

 

◆'1만명이 1만원씩 모으면 1억' 설립 10주년 맞은 석성1만사랑회

전국 중증장애인 시설 5곳 건립…거주·재활 돕기 '발벗어'

 

미얀마 양곤에 울려퍼진 애국가…학교건물 건립 등 해외장학사업도 전개

국세청부터 경찰청까지 '힐링특강' 투어 요청 쇄도…'선한 영향력' 전파

 

2011년부터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공익법인 (사)석성1만사랑회를 설립했다. ‘1만명이 1만원씩 모으면 1억’이라는 모토로 출발한 석성1만사랑회는 내년이면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매달 1천116만원(11월 말 기준)을 후원받는 석성1만사랑회에는 조 회장의 진정성을 믿는 기부 회원 600여명이 모였다. 때로는 방송을 보고 찾아온 76세 할머니가 수억원을 맡기기도 하고, 고소영·장동건 가족 등 유명인과 동종업계 마음이 넉넉한 세무사들까지 매달 기부금을 낸다.

 

이들의 기부금으로 지금까지 전국에 총 5곳의 ‘석성 나눔의 집’이 지어졌다. 충남 논산(2014년)-경기 용인(2016년)-서울 서초구 양재동(2017년)-수원 중앙기독학교(2019년)-경북 구미(2020년) 순이다. 모두 중증 장애인을 위한 거주·재활 시설이다. 특히 4호점은 도예공방으로 장애 학생들의 진로 지도에 보탬을 주고, 올해 2억원을 들여 준공한 5호점은 여성 중증장애인 전용 생활관으로 지어졌다. 내년에는 1억원의 후원금으로 남성 중증장애인을 위한 추가 시설도 지을 계획이다.

 

장학사업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미얀마 양곤에서는 지난 2009년부터 매년 학교 건물을 1동씩 증축해 기증하는 해외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 시작은 조 회장이 한국세무사회를 이끌던 2008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 사천 대지진이 발생하자 조 회장은 회원들이 모은 성금 3만달러를 북경에 가져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얀마가 태풍 ‘나르기스’의 피해를 입었다. 8만여명이 희생된 재난이었다. 어떻게 도와줄까 현지 선교사에게 자문한 결과 태풍으로 학교가 무너져 학생들이 뙤약볕 아래 맨 땅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기로 했다.

 

이렇게 인연은 시작됐다. 미얀마의 옛 수도인 양곤에 위치한 딴린 제3고등학교에 매년 건물을 지어줬다. 첫 준공식에 방문했을 때는 학생 1천500명이 모여 환영해주는 것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도움이 계속되자 현지에서 '딴린 제3고등학교'에서 ‘대한민국석성고등학교’로 학교 간판을 바꾸고, 준공식땐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벅찬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올초 실내 체육관을 지었을 때는 세계 태권도 봉사단이 우연히 찾아왔다. 태권도 공연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남을 돕는 사람 곁에는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그래서 내 것을 계속 퍼주는데도 풍요롭다. 나눔의 역설이다. ‘감사한 일’이라고 조 회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혔어도 나눔은 계속된다. 이번 목표는 학생들이 1년간 사용할 학용품 꾸러미 1천500개를 만들어 내년 5월에 보내 줄 예정이다. 미얀마의 국군 통수권자인 민 아웅 군 최고사령관이 직접 요청한 바다. 아이들이 쓸 연필, 공책이 없어 중국에서 수입해 쓰는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더 나아가 미얀마에서 학용품 공장을 해 달라는 이야기도 오갔다. 이런 구상을 주변에 알리자 전국 지사장들은 물론, 학용품 제조업체의 자발적인 기부가 이어졌다. 이번에 만든 학용품 꾸러미도 대부분이 이들의 도움으로 준비됐다. 

 

현재 미얀마 군부 추천을 받은 장학생 2명은 한양대 안산캠퍼스에서 유학 중이며, 올해 1명이 추가 합격해 총 3명이 장학금을 받고 있다. 학비와 기숙사 생활비, 용돈 등 총 5천여만원을 석성장학회에서 지원한다. 조 회장이 정부의 신남방 정책 추진 기조와도 맞물려 민간 외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최근에는 ‘굿 스튜던트(Good Student)’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어느날 장학금을 받았는데도 시무룩한 표정의 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집이 가난해서 받는다’는 답변에 마음을 쓴 처사다. 장학금의 취지를 ‘저소득층 지원’이 아닌, ‘선행’을 장려하는 것으로 바꿨다.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평소 봉사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거나 타의 모범이 된 학생들에게 ‘굿 스튜던트’ 장학금을 수여한다.

 

그의 활동에 세상은 열렬히 화답했다. 조 회장은 국세청과 전국 지방청에서 모두 특강을 요청한 최초의 외부 인사가 됐고, 조세계 밖에서도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공직자의 모범’이라며 경찰청과 지방경찰청, 경찰종합학교, 경상북도교육청, 법무연수원 등 교육 요청이 쇄도해 ‘힐링특강 투어’를 진행했으며, 서초경찰서, 서초구청 등 지역 관서와 대동세무고, 부산대학교 등 교육기관의 요청도 잇따랐다.

 

특강을 다닐 때면 잊지 않고 어려운 이들에게 장학금을 건넸다. 암 투병 중인 자녀가 있는 국세공무원은 물론, 전국의 경찰공무원, 올해 코로나19 집중 피해를 입은 대구 지역 등 눈길 닿는 데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상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저절로 쌓였다. 서울고등검찰청사 신청사 앞에는 그의 얼굴상이 새겨진 청동조형물이 들어섰고, 작년에는 조 회장이 서울고검 검찰시민위원으로 위촉됐다.

 

경찰과 지역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공적을 인정받아 명예경찰관(명예경정)으로 위촉됐는데, 명예경정은 전국에 단 두 명 뿐이며 초임에 경정으로 위촉된 것은 조 회장이 처음이었다. 천안함재단 이사장으로 봉사한 후 해군창설기념일에 명예해군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교육부(2017)·행안부(2020) 장관 표창 등 정부 포상은 일일이 세기가 어렵다. 국세청 후배들은 ‘선배가 자랑스럽다’며 두 번이나 국세청장 감사패를 안겼다.

 

한국세무사회를 4년간 이끌며 전자신고세액공제를 확대한 장본인이 되고, 천안함재단 초대 이사장을 6년간 맡은 것도 나눔에서 비롯된 리더십이라는 설명이다. 조 회장은 “꿈이 이뤄지려면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며 “자식들에게도 ‘공부해서 남 주고, 돈 벌어서 남 줘야지’라고 가르친다”고 덧붙였다.

 

◆"지금부터, 여기서부터, 나부터, 작은 것부터, 실천가능한 것부터, 그리고 지속적으로"

국세공무원으로서의 자긍심 갖고 '나눔과 섬김'의 신조 평생 실천 

"후배들의 길잡이 역할 해주는 것이 내 책무"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의 명예본부장으로 활동하는 조 회장은 나눔과 섬김의 5가지 원칙을 소개했다. 바로 ‘지금부터, 여기서부터, 나부터, 작은 것부터, 실천가능한 것부터’다. 여기에 ‘지속적으로’ 하나를 더 하면 “나눔 중독자가 된다”고 했다. 말단 공무원이 대전지방국세청장으로 명퇴, 25·26대 한국세무사회장 연임을 거쳐 장관상을 받고, 대통령, UN사무총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 나눔에서 비롯된 인연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조용근 회장이 전하는 한 마디를 요약하면, “국세 감동공장이 돼라”다. “각자가 세상에 감동을 주는 감동 공장의 공장장이 되는 것이 선한 영향력”이라는 주문이다. 이어 “오늘 뭘 하고, 내일은 뭘 할지, 사회를 위한 어떤 일을 할지가 중요하다”며 “선배로서 현직에 있는 후배들을 동생,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잘 살아가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것이 내 책무”라고 말했다.

 

자조에 젖어 무기력한 젊은이라면, 혹은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그려나갈지 고심하는 이들이라면 그의 일대기에서 힌트를 찾아봄직하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라는 여느 노래 가사가 있다. 나눔도 세상에 뿌려진 나눔만큼 돌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다. 잠시 멈춰 나눔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포근한 눈이 겨울 추위를 덮어주듯이, 오랜 기간 쌓아온 선행의 온기가 연말연시 따스한 축복으로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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