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제한, 배출권 가격 하락 주요 원인
낮은 가격땐 설비·기술 투자보다 배출권 구매 선택
기후대응기금, 배출권 판매 수익이 재원…규모 축소
점진적인 이월 제한 완화·추가 보완장치 마련해야
국내 대표 국책연구기관인 KDI(한국개발연구원)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배출권거래제 이월제한을 완화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윤여창 KDI 연구위원은 18일 '배출권거래제의 시장기능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미사용 배출권 이월 제한으로 인해 상향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배출권 거래시장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며 "이월 제한을 완화해 제4차 계획기간에 배출권 공급이 급감하며 발생할 충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월 제한 완화가 배출권 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초래할 경우에 대비해 예비분을 활용한 명시적인 시장안정화 제도를 도입하고 배출권 공급의 창구를 확대하는 보완 장치를 함께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우리나라의 배출권거래제는 기업과 경제에 미치는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달성할 목적으로 2015년에 도입됐다.
참여업체는 크게 유상할당 대상업체와 무상할당 대상업체로 나뉜다. 탄소누출 가능성과 비용부담이 높은 기업은 기업경쟁력 보장 차원에서 배출권을 전량 무상할당하고, 그 외의 대상업체는 거래시장이나 경매 등을 통해 일정 비중 이상의 배출권을 유상으로 구매토록 하고 있다.
제1차 계획기간(2015~2017년)에 100% 무상할당으로 시작된 이후, 제2차 계획기간(2018~2020년)부터는 유상할당이 시작됐으며, 제3차 계획기간(2021~2025년)에는 유상할당 비중이 10%로 확대됐다. 또한 2019년부터는 배출권 경매가 시행되면서 매일 운영되는 거래시장뿐만 아니라 매달 1회 시행되는 경매를 통해 배출권을 구매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됐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상당한 수준으로 강화됐지만 배출권 가격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며 "가격기제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시장을 통한 감축목표의 효율적 달성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 배출권 가격은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반까지는 주요 배출권거래제 중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으나 2020년과 2021년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전세계적으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상향되면서 주요 배출권 가격이 2~3배 이상 급격히 상승한 것과 대조적이다.
배출권 가격이 낮게 유지되면 참여업체들은 온실가스 감축 설비 및 기술에 투자하기보다는 배출권을 구매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배출권 판매 수익을 재원으로 하는 기후대응기금의 규모도 축소된다.
보고서는 배출권 가격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미사용 배출권 이월 제한을 지목했다. 현행 배출권거래제는 거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초과 배출권을 다음 연도 이후에 활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배출권 추가확보 유인이 감소해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
배출권거래제의 가격시그널 기능이 적절히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낮은 가격이 유지됨에 따라 조기 감축이 충분히 효율적인 기업들조차 감축 노력을 줄이고 배출권을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2026년부터다. 제3차 계획기간이 2020년에 마련됨에 따라 상향된 2030년 감축목표가 제3차 계획기간의 배출권 총공급량에 반영되지 않고 있지만, 2026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제4차 계획기간에는 상향된 감축목표가 반영돼 배출권 총공급량이 급격하게 줄어들 전망이다.
보고서는 "만약 이월이 제한되지 않는다면 공급량의 급격한 감소에 따른 충격이 여러 해에 걸쳐서 분산될 수 있지만, 이월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제4차 계획기간이 시작되는 2026년을 기점으로 그 영향이 단기간에 집중돼 시장 변동성이 확대되고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기업의 대응 부담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따라서 "상향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배출권 시장에 반영될 수 있도록 배출권 이월 제한을 조속히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출권 이월 제한이 완화되면 단기적으로 배출권 수요와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점진적인 이월 제한 완화와 함께 추가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사전에 설정된 가격단계에 따라 계획된 예비분을 추가적으로 공급하는 시장안정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배출권 가격과 공급을 안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시장효율성을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유상할당 업체로 한정돼 있는 경매 참여대상 제한을 완화해 배출권 거래시장의 공급 부족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감축경로를 반영한 배출권 총공급량에 대한 장기 계획을 사전에 공고해 시장 운영의 예측 가능성을 개선할 필요성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