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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24. (금)

[연재]세법·세정·세무 분야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12)

국세행정과 기업세무회계의 수준을 높인 국립세무대학과 대한세무협회

 

한국세정신문은 창간 58주년을 맞아 조세법학계 거목에게 세법세정세무에 대한 후일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대학 세무학과의 출범, 종합소득세제 및 부가가치세제 뒷얘기, 국립세무대학 출범과 폐지, 자료상, 세제발전심의위원회, 세무사시험제도, 상증세, 세무행정, 지방세, 변호사와 회계사·세무사 등 조세 역사 주요 사건에 얽힌 뒷얘기를 반추하며 세법·세정·세무에 대한 지향점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이에 우리나라 세무회계학 및 조세법학의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다한 송쌍종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로부터 '세법·세정·세무 분야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편집자 주>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서 한 나라의 정부가 재정재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의 징수이다. 때로는 정부가 채권(예 국채)을 발행하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임시적이거나 보충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債券)을 사는 기업(예 은행)이나 개인에게는 미리 약속한 이자를 정부가 거의 매년 지급해야 하고, 만기가 되면 그 원금도 갚아야 하므로, 채권발행이 주된 재정재원의 확보방법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45.8.15. 광복 후 한반도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분단국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만 3년이 되자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國號)를 내세운 독립정부를 수립하여 마침내는 건국대통령으로 군림한 바 있다. 그 후 1961.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장기간 대통령을 역임한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흔히 경제(산업)대통령 또는 부국(富國)대통령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중화학공업 등의 경제발전계획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 결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 5개년계획은 제1차부터 제4차까지(1962~1981)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제5차와 제6차(1982~1991)는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이라는 이름이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5개년계획(1993~1997)은 ‘신경제5개년계획’이라고 명명되었다. 


이상의 경제개발계획들을 총괄하여 간단한 일람표로 요약한 내용 중에서 주요 산업이라는 부분을 보자면, 제3차 때에는 특히 중화학 공장 건설이 강조되었으며, 제4차 때에는 특히 기술 혁신이 강조되었었다. 이들 두 가지는 모두 엄청난 재정수요를 불러오는 것들이다. 그런데 경제개발 초창기에 이러한 재정수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독일(당시의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봉급을 담보로 제공하기로 하고서 개발차관을 얻어왔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이다. 그러다가 위 제3차와 제4차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데에 소요되는 재정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1975년에는 종합소득세제의 도입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세제개혁을 단행하였으며, 1977년에는 새로운 세제인 부가가치세제의 도입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두 세제는 국가세수의 확보를 위하여 대단한 기폭제가 되었음은 앞의 글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세제만으로써 세수가 저절로 확보될 수는 없다. 재정재원의 원활한 확보가 가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세상이치이다. 이러한 인프라의 구축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2년제의 국립세무대학(이하 ‘세무대학’)과 사단법인대한세무협회(이하 ‘대한세무협회’)라는 두 조직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즉 한편으로는 국세행정(세무행정)을 위하여 세무대학으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 인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가 앞장서는 산업화 정책의 저돌적인 추진으로 말미암아 다수의 중견기업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가운데 기업세무회계의 보편적인 수준을 높이는 역할의 선봉에는 민간조직인 대한세무협회가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세당국의 세무조사기법이 급속히 발달하는 가운데 기업들의 대응전략 또한 비례적으로 향상발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결과 국가의 일반적인 재정수요는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에 의존하지 않고 세수증대의 효과만으로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하였던 세무대학과 대한세무협회의 숨은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들 세무대학과 대한세무협회의 탄생과정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므로, 필자가 들은 얘기를 여기에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대학원 석사학위과정을 마친 뒤 7년간 시간강사를 거쳐 1976년 제1학기초부터 석사학위(상법)만을 바탕으로 비로소 대학의 전임강사 자리에 올랐다(당시는 박사학위의 소지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곳은 중앙대학교 경영대학의 무역학과였으며, 무역거래법(현재의 대외무역법)과 외국환관리법(현재의 외국환거래법) 및 관세법을 강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기회에 같은 학과 소속의 이상천 교수(원가회계 등 회계학 전공)와 사귀게 되었다. 필자보다 훨씬 연배이신 교수이었지만, 당시에 별도로 세무회계 교과서를 저술하고 있던 필자는 자연스럽게 그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었다. 다만 그 분에게서 들은 얘기 뿐이며 다른 증거를 갖추지 못한 점은 지극히 아쉬운 대목이다.


위 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세무대학과 대한세무협회는 일본에 똑같은 선례가 있었으므로 그 내용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같은 내용의 두 조직을 우리나라에도 설치하도록 한 것은 박태준이라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철강왕’으로 불렸으며, 제32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셨고 또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었으므로, 위 두 기구를 추진한 공로는 크게 부각될 이유가 되지 못했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에 따르면, 박 대통령과 돈독한 친분이 두터운 그 분이 5.16 쿠데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이유는 만약 쿠데타를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기 가족의 안위를 박 대통령이 부탁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상의 설명을 인터넷으로 만나게 된 필자는 박 전 총리의 건의를 대통령이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포항제철회사를 잘 건설하고 잘 발전시킨 사실과 강직하고 청렴하였다는 그 분의 알려진 인품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등에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을 도와서 위 두 조직의 설립에 필요한 서류작성에 직접 기여하셨다는 위 이 교수님의 뒷얘기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위 두 조직의 역할에 관하여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세무대학은 1981년 3월 개교하여 2001년 2월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되었다. 2년제 전문대학급의 국립학교였다. 당초에는 세무전문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다가, 세무대학설치법이 제정됨에 따라 세무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내국세과 280명과 관세과 80명씩 매년 모집되었다. 재경부(현재의 기획재정부) 소속의 특수대학이었으므로, 등록금 등의 학비를 포함하여 기숙사와 교복 및 식비 등이 모두 국비로 제공되었다. 내국세과를 졸업한 후에는 국세청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으며, 의무복무기간은 4년이었다. 관세과를 졸업한 후에는 관세청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으며, 의무복무기간은 역시 4년이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근무하는 것은 자유의사에 달린 일이었다. 따라서 세무사시험이나 관세사시험에 합격하여 4년 후에는 퇴직 후 개업세무사나 개업관세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기업체에 발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입학생의 자질은 꽤 우수한 편이었다.


더구나 졸업 후의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사실은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지방의 저소득층의 자녀에게는 세무공무원의 자격이 자동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 점은 필자가 시울시립대학교에 세무학과가 설치된 후에 30명의 정원 중에서 20명씩 서울시 세무공무원으로 8년간(4년제 대학이므로 8년이다)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겨우 등록금만을 지원하는 열악한 지원임에도 우수한 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여든 사례를 직접 목도하였기 때문에 잘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렇듯 순항하던 세무대학에 관하여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360명이나 되는 졸업생들이 매년 국세청 공무원과 관세청 공무원으로 계속하여 진입되는 과정 속에서 현역으로 근무하는 사람들과 민간으로 전출한 사람들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연결고리를 은밀하게 형성하는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스님)이 고기맛을 보면 어떻게 된다는 속담이 연상되는 일이 가끔 발생하게 되었고, 그것이 소문을 타고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김영삼정부의 말기에 세무대학에서 2년제를 4년제로 바꾸는 작업이 은밀하게 추진되었는데, 이 얘기가 전해지자 국세행정을 걱정하는 뜻있는 인사들이 4년제 세무대학의 출현을 막아야 된다는 의견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이 필자에게 전면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필자는 이에 선뜻 응하여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세 페이지 가까운 선언문에서 여러 분의 의견을 참고하여 4년제 정규대학의 경영학과나 회계학과에서는 이미 매년 3천 명쯤 되는 졸업생이 배출되는 마당에 4년제 세무대학은 곤란하다는 사실과 육군사관학교나 경찰대학과는 성질이 다르므로 일반 대학의 자비학과 졸업생을 차치하고서 4년제 관비학과인 세무대학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그 추진을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몸소 대도시 몇 군데를 순방하여 도합 63명인가의 서명을 받아 문교부(교육부)에 발송하였다. 그 성명서의 효과가 있었다고 믿긴 하지만, 아무런 연락을 받지는 못한채로 4년제 세무대학안은 없었던 것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그 후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뒤의 일이었다. 서울시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집단으로 국세청장을 방문하여 위에서 지적한 연결고리의 부작용을 해결하라고 하는 항의가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과 관련하여 전화 한통도 받지 못한 필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그렇지만 얼마 후에는 세무대학의 폐교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얼마 후에는 서울시립대학교 세무학과 졸업생들에게서 세무대학을 송 교수가 없앴다고 얘기들을 하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예가 생겼다. 그럴 만한 힘이 있으면, 내가 아직도 세무학과 교수로 근무하겠는가 하고 웃어넘기고 말았다. 다만 필자가 초안을 작성한 성명서의 내용이 참고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대한세무협회는 민간쪽의 세무지식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비영리 사단법인의 형태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 단체를 만들어 놓고서 박태준 총리는 사계에서 유능하고 단체의 경영을 맡길 만한 인물을 물색하였는데, 그가 바로 공인회계사와 세무자 자격을 겸비한 유명인사 이해동 변호사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1973년으로 기억하는데, 이 협회에서 6개월여 기간 동한 세무상담을 맡은 바 있다. 하루에 100여 통의 전화상담을 받느라 미처 통화내용을 요약하는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만큼 대한세무협회에의 의존도가 높았던 것이다.


이 대한세무협회는 “회계와 세무”라는 월간잡지(1969년에 창간하여 2013년경 다른 외부인사에게 양도)를 발행하면서 조세법령의 개정조문을 부분마다 인쇄한 후에 보급사원이 현장을 방문하여 그것을 갈아끼워 주는 이른바 가제식(加除式)의 조세법령집을 발간하여 왔다. 이밖에도 수십 종의 조세관련 단행본을 발간․보급하였다. 요즈음과는 달리 인터넷이 활용되지 못하던 시대에 기업에서는 회원사 자격으로 위 월간지와 함께 법령집을 구독하였다. 이 협회의 활동을 본받아 수많은 경쟁사가 난립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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