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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문예마당/稅政詩壇]유럽 배낭 여행기 (영국편)

-박귀근, 부천署


1. 도돌이표를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을까?
중국이 자랑하는 어마어마한 만리장성이나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은
한결같이 타민족을 노예로 삼아
아니면 자기네들의 무고한 서민계층을
강제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듯이
세계 곳곳에 유니온 잭의 깃발을 휘날리며
해가 질 겨를이 없었다는 대영제국의 박물관에는
바이킹이었던 그네들의 조상들이 옛 식민지들로부터
파렴치하게 도굴하거나 무작스레 약탈한 것으로
우격다짐에 의해 터무니없는 헐값에 사들인 것들로 가득 차있다.

오히려 놓여 있던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였더라면
더욱 빛났을 인류 공유의 찬란한 문화유산들.
총칼로 무지막지하게 강탈해 온 그러한 전리품들을
천연덕스레 전시해 놓은 몰염치한 행위는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명백한 범죄.
예나 지금이나 인류의 역사는
지배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들의 손에 의해
하나하나 만들어지는 경정체임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에 의해 약소국들은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것일까.
광포한 압제자의 명령에 따라 함부로 재단된 채
온통 칙칙하고 어두운 면만 부각되어 계속하여 되풀이되는 것일까.

2. 흑인은 인류의 조상
이분법(二分法)에 철저했던
서구 문명의 잔재로
2층 버스는 영구 보존할 가치가 있는
역사적 유물(遺物).
야누스의 양면성을 그대로 드러낸
움직일 수 없는 징표의 상징물인 2층 버스는
지금도 버젓이 활개펴며 런던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다.
극도의 우월주의란 함정에 빠져
흑인들을 강제로 데려와
종으로 마구 혹사했던 지난 날.
위로 올라가는 조그만 수고로움을
피할 심산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개차인 2층 버스에 흑인들을 태우고
거짓 주인 행세하며 아래층에 편안히 앉아
점잖을 빼며 문명을 들먹이면서
너털웃음과 함께 평등과 자유를 즐겨 논하고들 있었다.
정작 노예라 업신여기며 천대하던 흑인들이
대영제국의 선민(選民)들 머리 위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향수(鄕愁)에 젖은 채
조금은 슬픈 듯한 묘한 웃음을 지으며 두 발로 지긋이
주인들의 정수리를 내리누르고 있는 환영이 얼핏 보였다.

3. 사랑의 불꽃은 활활 타오르는데
전 세계의 뭇 여성들로부터는
선망(羨望)의 대상으로
전 세계의 뭇 남성들로부터는
동경(憧憬)의 대상으로 성가(聲價)를 올렸던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그녀를 전혀 거들떠보지 않으며
품격이 다소 떨어지는 미망인 신분의 카밀라 부인과
결혼 전부터의 오랜 밀회를 즐겨오던 왕세자 찰스.
빌미 삼아 맞바람을 일으키며 여러 남성과의 염문 끝에
부호의 아들과 마지막이 된 애정행각을 벌이던 중
끈질긴 파파라치의 추격을 따돌리려다가
타국(他國)에서 추돌 사고로 비명횡사한 비운의 다이애나.

마찬가지로 미망인이었던 심프슨 부인과
세기(世紀)의 사랑을 위하여
대영제국의 왕관을 기꺼이 마다하고
평범한 지아비의 신분으로 돌아가
사별(死別)하는 날까지 서로 오순도순
행복한 삶을 누렸던, 왕세자의 선조인 윈저공(公).
아득한 오백 여 년 전 영국에서
신실한 신부(神父)였던 내가 학(鶴)을 닮은 수녀(修女)와
금단의 사랑을 남몰래 나누다가 함께 파문(破門)을 당한 뒤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던, 아련한 전생(前生)의 기억 한 토막 ….

4.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불후의 명작으로 후세에 명성을 떨친 셰익스피어.
<천로역정>의 존 번연, <유토피아>의 토마스 모어.
<율리시즈>의 J. 죠이스, <테스>의 토마스 하아디.
<실락원>의 존 밀턴, <크리스마스 캐롤>의 CH. 디킨즈.
<보물섬>의 스티븐슨, <걸리버 여행기>의 J. 스위프트.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로렌스, <살로메>의 오스카 와일드.
자매인 <제인 에어>의 C.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E. 브론테.
<페이터 산문>으로 잘 알려진 W. 페이터.
<엘리아의 수필>이란 감동적인 수필집을 펴낸 차알스 램.
"주님의 부르심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하리라"고
여섯살 연하인 남편(詩人)에게 속삭였던 시인 E. 브라우닝.
<초원의 빛>과 <무지개>의 계관시인(桂冠詩人)인 워즈워드.
언어의 <황무지>를 개간한 T. S. 엘리어트.
<이니스프리로 가리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예이츠.
불구의 몸이었지만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바이런.
이탈리아에서 여행 도중에 익사한 불운의 시인 셸리.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 키츠, ….
부슬비가 내리는 밤,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내려서는데
어느새 고명하신 문호(文豪)들이 가을의 빗방울로 변신하여
타고르가 예찬한 동방의 등불 ㅡ 코리아에서 찾아온
무명시인의 어깨와 등을 토닥이며 감싸 안고
메마른 가슴마저 촉촉하게 적셔주던 감동의 첫 방문지 ㅡ 영국.

5. 유로스타에 몸을 싣고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인구론>의 T. L. 말사스.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박물학자 찰스 다윈.
청년들에게 자기향상을 설파한 <자조론(自助論)>의 스마일즈.
<자유론(自由論)>을 체계적으로 주창한 T. S. 밀.
<경험론적 방법론>, <베이컨의 수필집> 등으로 다방면에서
해박한 재능을 보였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프란시스 베이컨.
<황금의 가지>란 저서로 잘 알려진 인류문화학자인 프레이저.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 불렸던 철학자 버어트런드 럿셀.
열두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역사의 연구>로 학계(學界)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저명한 역사학자인 아놀드. J. 토인비.
그밖에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홉즈, 존 로크, G. 버클리…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기라성 같은 거목들이
영국을 방문하고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떠나려는,
동방의 등불 ㅡ 코리아에서 온 무명시인을
아무런 격의 없이 환송하기 위하여 성큼성큼 다가온다.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중후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두런두런 주고받으면서
워털루 역에서 유로스타를 기다리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주註): 유로스타(EURO - STAR)
'93년에 개통한 초고속 열차로서 53KM의 해저 터널을 통과하는데 약 18분 가량 소요되며, 영국의 런던에서 프랑스의 파리까지 약 세 시간 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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