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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12. (일)

내국세

[특집]추경석 “국세청은 국가조직의 기둥·자부심”

창간 50주년 기념 ‘財政先覺者’ 기획 인터뷰- < 1 >

TIS구축…타부처 반대불구 예산 3천억 확보 '세정전산화' 초석

 

 

 

2015년은 한국세정신문이 창간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65년11월1일 탄생한 ‘한국세정신문’은 대한민국 근대 재정정책사의 산 증인이다.
‘초근목피’의 굶주림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까지 ‘한국세정신문’은 영욕의 현장을 오롯이 지켜봤다.
오늘의 강대한 대한민국은 국가재정 정책과 그 운영자들에 의해 기획·리드됐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역사를 개척해낸 수많은 ‘재정선각자(財政先覺者)’들의 피와 땀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지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지나간 50년 동안 대한민국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재정선각자’ 5인을 엄선, 특별 인터뷰를 시행한다. 재정정책의 지나간 50년 발자취를 되돌아 보고, 그 역사를 기록해 두고자 함이다.
미래 50년의 국가재정 비전과 재정운영 좌표가 그 속에 듬뿍 담겨 있을 것이다.
‘재정선각자’들은 지난 50년간 본지에 보도된 기사 내용과 여론 호응도, 재정‧세정발전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집계‧선정했다.<편집자 주>

 

 

 

 

 

 

□ 추경석은 누구인가 -

 

‘큰 국세청'- 위상 제고
청탁 피하려 휴일마다 산행
말단→청장→장관…입지전적 인물

 

 

 

추경석 제8대‧제9대 국세청장은 2명의 대통령(노태우·김영삼)으로부터 국세청장에 임명된 사상 첫 국세청장이다. 1991년12월21일부터 1995년12월20일 건교부장관으로 영전해 가기까지 만 4년간 국세청을 이끈 그는 국세청 위상 제고 및 직원 사기진작과 함께, 국세행정 전산화(TIS)의 주춧돌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또 김영삼 정부 시절 ‘작은 정부 지향’이라는 큰 틀 속에서도 전대미문의 조직 확대를 성공시켰다. 그는 차장 시절인 1987년말부터 국세청 조직 확대에 대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이를 성취해 낸 것이다.

 

 

 

 

 

 

 

이로 인해 ‘국세청만 쌀밥 주느냐’는 등 당시 관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특히 국세청 직원들을 ‘주사’에서 ‘조사관’으로 칭하도록 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 항일 독립운동가(故 秋圭暎 翁=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아들답게 추경석 국세청장은 직원들에게 붙어다니는 ‘주사’ 라는 왜색(倭色)’ 호칭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됐을 뿐 아니라 직원들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 ‘조사관’으로 단호하게 바꿔버렸다. 국세청 직원의 ‘조사관’으로 호칭 변경은 이후 다른 정부기관의 직원 호칭도 ‘주사’에서 ‘조사관’ 또는 ‘전문관’ ‘행정관’ 등으로 변경을 이끌어냈다.

 

당시 추경석 청장을 가까이 보좌했던 사람들은 직원 인사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남다른 철학과 신념을 단호히 실천했던 국세청장으로 기억한다.

 

그는 서울청장과 국세청 차장, 청장 등 1급이상 자리에 10여년 머무는 동안 북한산을 500회나 등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말이면 무조건 북한산으로 향했다. 그것은 이해관계인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YS정부 초기 차관급 전원이 사표를 낼 때  최인기 내무부 차관과 추경석 국세청장 단 두명만 살아남았었다. 이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업무능력으로 얻어진 소산이라는 점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MB정부 출범 직후 국세청이 국세청 고위직의 비리행위 등으로 인해 ‘조직 축소개편’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맞았을 때 ‘국세청 조직 축소는 절대 안된다’는 장문의 건의서를 청와대에 넣어 국세청 조직 축소를 극적으로 막아 낸 장본인이 바로 추경석이다. 그는 국세청이야말로 국가조직의 ‘기둥’이요 ‘자부심’이라고 단언했다.

 

 

 

 

 

 

“꿈도 못꾸던 호남출신을 본청총무과장 등 요직에 전격 기용-‘깜놀’”

 

 

 

‘최고특급대우 로펌행 끝내 사양, 고위공직자 본분 자존심 지켜…귀감’

 

 

 

 

□ 건교부 장관도 역임하셨지만, 명(名)국세청장으로 더 강하게 각인돼 있습니다. 또 국세청 개청이후 첫 내부발탁 청장이라는 점도 의미가 컸습니다.

 

 

 

“재임기간 중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조세수입이 예산 상의 세입을 초과함으로써 국세청은 세정 본연의 자리에서 내실있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조세행정도 차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습니다. 이에 따라 종전에 착안되지 못했던 새로운 업무를 시도하는 등 세정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우선 효율적인 세원관리와 양질의 납세서비스 제공을 위해서는 적정인력과 조직의 확보가 필수적이었으므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여건 하에서도 필요한 인력과 조직을 충실하게 확충했습니다.

 

무엇보다 직원의 자질 향상과 사기진작을 기하고자 1992년 7월에 7개 분야의 ‘세무전문관’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했으며, 각 분야에 대한 정예요원 양성을 위해 국제조사·송무·조세범조사 등 분야별 전문요원을 지속적으로 육성했습니다.

 

또 복수직급 승진제, 근속승진 8급까지 확대, 6급 정원 확대, 기관운영비·출장비 현실화 등을 통해 직원들의 실질적인 사기진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국세청장 재임시절 도입한 국세정보통합관리시스템(TIS)은 국세행정 정보화를 이룩하는 일대 전기가 됐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 예산 확보에서부터 어려움이 많았다면서요.

 

“국세행정의 전산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국세청 전산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편을 모색하던 중 금융실명제의 전면 시행을 계기로 ‘국세정보 통합관리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전산시스템 구축은 많은 예산이 필요한 바,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발표된 금융소득 종합과세의 본격적 시행 준비를 계기로 예산을 확보해 연도별 전산장비 확충계획과 함께, ‘국세정보 통합관리시스템(TIS)’ 구축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당시 일선 세무서에는 각 계(係)당 1대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지만 저는 직원당 1대씩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산은 3천억원이 필요했지만 당시 재경부에서 1천500억원의 예산만을 책정하자, 청와대에 전산장비 확충의 필요성을 강조해 전액을 확보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러한 시스템 구축은 일선 직원들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부담에서 벗어나 치밀한 세원관리와 양질의 납세서비스 제공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정집행의 기본틀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 것이 결국 TIS를 기반으로 한 국세행정 정보화 초석이 됐다는 후배들의 말을 들을 때 나름대로 큰 보람을 느낍니다.”

 


 

 

 

“국세청직원 호칭,‘주사’를 ‘조사관’으로 변경…부처들 동조”

 

“‘국세청 조직 축소 개편’위기때 역할할 수 있어 기뻤다”

 

 

 

 

MB정부 출범 직후 국세청을 감시하는 외부감독기관 설치와 지방국세청을 없애는 것 등을 골자로 한 국세청 기구 축소가 시행 직전단계일 때 청와대에 건의서를 넣어 백지화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신념은 변함없습니까.

 

“물론이죠. 국세청은 어느 개인의 조직이 아닙니다. 국가 운영이 돌아가게 하는 중추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국세청입니다. 그처럼 막중한 소명과 기능을 갖고 있는 국세청 조직이 몇몇 특정인의 잘못 때문에 조직과 기능이 축소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합당한 처벌을 하면 되는 것이지, 국가중추 기능을 건드린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이치에도 안 맞는 발상이지요.

 

국세청은 강해야 합니다. 특히 유능하고 국가관과 소명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국세청 기능이 축소되는 것은 바로 국가가 허약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그 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국세청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국세청이 일방적으로 이리저리 재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국세청은 강해야 한다는 점과 그 이유를 설명하고 강력히 건의하게 된 것인데, 다행히 그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 같아 매우 기뻣습니다. 그 건의서를 낼 때 주위의 많은 국세동우들이 힘을 하나로 모았던 것도 지금 돌이켜 보면 참 고맙고 뿌듯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수년간 국세청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었고, 아직 치유단계에 있다고 봅니다. 이 시점에서 국세청 후배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단단한 국세청 조직이 극소수 최상층부의 불미스런 일로 국민신뢰도가 낮아진 게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단시일안에 안정을 되찾은 것은 국세청 전통과 선·후배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국세청 상층부에 있는 간부들일수록 더욱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국세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국세청을 누구보다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 국세청의 발전을 계속 성원할 것입니다. 국세청 조직은 국가재정을 책임진 국가중추기관이기때문에 그 조직원은 사명감과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추경석 전 국세청장은 인터뷰 말미에 ‘몇몇 불미스런 사건 등으로 인해 국세청 위상이 손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국세공무원은 매우 유능하고 사명감이 투철한 데다 헌신적이기 때문에 국민불신은 머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면서 ‘국세공무원들은 자긍심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꿈도 못꾸던 호남출신을 본청총무과장 등 요직에 전격 기용-‘깜놀’”

 

 

 

‘최고특급대우 로펌행 끝내 사양, 고위공직자 본분 자존심 지켜…귀감’

 

 

 

 

 

직원인사는 물론 국세청 간부인사에서도 그는 ‘공평’ ‘능력’ 위주 인사를 실천함으로써 국세청 출범 후 26년간 계속 제기돼 온 특정지역 우대 인사논란을 잠재웠다.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호남 출신 인사들을 총무 조사 등 주요보직에 전격 기용한 것이다.

 

 

 

봉태열 전 서울국세청장은 “추경석 청장께서 공보관이던 저를 총무과장에 전보할 때 너무 놀랐다”면서 “당시 호남 출신이 국세청 총무과장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했다”고 기억했다.

 

 

 

봉 전 서울청장은 이어 “제가 추 청장님하고 지연 학연은 물론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위사람들도 놀라워 했다”고 덧붙였다.

 

추 장관은 공직퇴임 이후의 처신도 후배들로 하여금 ‘존경’의 대상이 됐다.

 

한 국세청 고위직 출신인사는 “추 전 장관이 퇴임했을때 유수의 로펌에서 그를 영입하려 애썼지만 그는 끝내 사양하고 고위공직자출신으로서의 본분과 명예를 지킨 것으로 각인돼 있다”면서 “화려한 경력이 말해 주듯 그는 최고의 초특급대우를 받을 수 있는 데도 로펌행을 끝내 물리리친 것은 국세청의 자존심이자 공직사회 전체의 긍지요 귀감으로 전래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작년말 국가보훈처 보도자료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고(故) 추규영 선생의 장남인 추경석 전 장관은 1995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독립유공자에게 지급되는 위문금 등을 모아 매년 500만원을 형편이 어려운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위해 보훈처에 기탁했다. 그동안 추 전 장관의 도움을 받은 독립유공자와 유족은 208명이며, 금액은 1억500만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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