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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10. (금)

내국세

[특집]'공무원, 한직서 더 열심히 하면 기회는 꼭 온다'

-창간 50주년 기념 ‘財政先覺者’ 기획 인터뷰- <2>

-"한직에 있을 때 더 열심히 하면 기회는 꼭 온다"-

 

 

 

조달청장-보건복지부장관 때 '국세청 맨' 위상 유감없이 발휘

 

 

 

2015년은 한국세정신문이 창간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65년11월1일 탄생한 ‘한국세정신문’은 대한민국 근대 재정정책사의 산 증인이다.
‘초근목피’의 굶주림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까지 ‘한국세정신문’은 영욕의 현장을 오롯이 지켜봤다.
오늘의 강대한 대한민국은 국가재정 정책과 그 운영자들에 의해 기획·리드됐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역사를 개척해낸 수많은 ‘재정선각자(財政先覺者)’들의 피와 땀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지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지나간 50년 동안 대한민국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재정선각자’ 5인을 엄선, 특별 인터뷰를 시행한다. 재정정책 50년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고, 그 역사를 기록해 두고자 함이다.
미래 50년의 국가재정 비전과 재정운영 좌표가 그 속에 듬뿍 담겨 있을 것이다.
‘재정선각자’들은 지난 50년간 본지에 보도된 기사 내용과 여론 호응도, 재정‧세정발전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집계‧선정했다.<편집자 주>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장관(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공무원은 한직에 있을수록 더 열심히 하면 기회는 꼭 온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국세청, 재정확보 노력 하면서도 '苛斂誅求' 한단 말 안나와 퍽 다행"

 

 

 

-김성호는 누구인가-

 

 

 

국세청 1급에서 타부처 차관급 영전…국세청 사상 처음 성취한 '쾌거'

 

 

 

 조달청장-보건복지부장관때 전자입찰-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배출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세정과는 거리가 먼 부처의 장관을 지냈지만 실상은 ‘국세청맨’이다. 행시(10회) 패스후 그는 국세청 사무관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 세무서 과장, 세무서장, 본·지방국세청 국장, 서울지방국세청장 등을 역임했으며, 직세‧간세‧기획 등을 두루 섭렵한 ‘올라운드 국세행정가’다.

 

김성호 전 장관은 세무서 과장에서 1급인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역임하기까지 ‘국세청 개혁 아이콘’으로 통했다.

 

당시 김 전 장관의 업무능력과 성향을 알아본 고위관리자들은 그를 항상 가까이에 두기를 원했고, 급기야 1980년대초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세무서 과장에서 세무서장 승진’이라는 파격을 일궜다.

 

특히 국세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에서 바로 타 부처 차관급(조달청장)으로 영전해 나갔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세정가에서 ‘전대미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국세청 고위공직자가 타 부처 차관TO를 거머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히 국세청 인맥구조상 ‘서광’과도 같은 쾌거였다.

 

조달청장 때는 조달행정을 일대 개혁, ‘국세청맨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위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달청장 부임 직후 사상 처음으로 정부조달물자 전자입찰제를 도입해 관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정부조달물자와 관련 ‘복마전’이라는 오명이 불식됐으며, 이 일은 정부조달계에선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조달청장 시절의 이러한 능력 발휘는 보건복지부 장관 영전으로 이어졌다.

 

2002년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때는 세계 3대 국제기구인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을 우리나라에서 맡는 쾌거를 일궈냈다.

 

2003년 공직을 떠난 뒤에도 그는 ‘사회공헌’ 활동을 꾸준히 펴고 있어 고위공직자로서, 특히 ‘국세청맨’으로서의 자긍심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나눔문화의 체계적 확산을 지향하는 ‘바른사회공헌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또 호남 발전과 대한민국 번영을 함께 추구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한때 정치권에서 숱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일체 거절하고 소신대로 ‘사회공헌’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 먼저 김 장관께서 2000년대초 정무직(조달청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역사 사극을 보지 말라’라고 말했던 것이 중앙일간지 가십기사에도 소개돼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죠?

 

- 지금부터 한참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까지 기억해 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정무직으로 재직하고 있을 그 당시에 TV방송 3사에서 장희빈, 한명회, 여인천하 등 조선조 권력암투를 그린 역사 사극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전직원 정례조회때 “역사 사극을 보지 말라”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공직자는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는데 사극에 나온 것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권모술수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권력 암투, 음해를 보면 공직자들이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못된 짓을 모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 국세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에서 바로 타 부처 차관급으로 영전해 나간 것이 지금까지도 세정가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 제가 1999년도 경인지방국세청장에서 운이 좋아 서울지방국세청장으로 승진해 1년 이상 재직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인사적체로 고참이었던 저와 차장이 무언의 용퇴압력을 받게 됐죠. 그래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겠다는 결심으로 국세청장실에 들어가 사퇴서를 내면서 “청장께서 앞으로 2달후 있을 개각에서 장관으로 영진해 나가시게 되면, 그 때 저를 능력이 있는 공직자로 생각한다면 청장으로 천거해 주시고, 그대로 청장으로 유임하신다면 제 사퇴서를 처리해 달라”고 비장하게 말씀드렸더니 그러겠다고 안정남 국세청장께서 수락했습니다.

 

그 당시 내부 평판, 신망도, 국가관 등을 토대로 한 인사 참고자료가 정부 최고위층까지 올라가는 인사시스템이 가동돼 운 좋게도 개각에서 조달청장으로 승진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 본청 국장을 2군데나 거치고도 대개 초임 부이사관 승진자들이 가는 자리인 국방대학원에 1년간 파견발령됐을 때의 심정은? 그 때 이수생 중 1등을 차지해 화제가 됐는데요.

 

- 그 당시 본청 기획관리관을 거치고 재산세국장으로 있을 때였으니까 당연히 다음 인사에는 지방국세청장으로 나갈 것으로 생각했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런데 대선(1997년)때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의외로 국방대학원으로 파견 발령을 받게 됐습니다. 그 당시 임채주 청장께서 저를 각별히 챙겨주고 있어 국세청장의 뜻은 아니고 혹시 말 못할 정치적 요인이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사실 좀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김성호는 이제 끝났구나’하는 소리도 들리구요. 그래도 파견나온 타 부처 부이사관들과 대령급이상 군 장교들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학문을 익히면서도 1년 동안 골프를 실컷 쳤지만 저는 국방대학원에 왔으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등 다양한 분야 학습을 우직하게 해냈습니다.

 

 

 

이게 ‘국세와 재정’이라는 한 우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책분야 시야를 넓이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습니다. 공식적으로 공개는 안 됐지만 제가 197명의 이수생 중 1등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을 한참 지난 후 알게 됐습니다.

 

 

 

국대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했다는 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아닌 분위기였으나, 그 후 국세청을 떠나 조달청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는 ‘국세’와는 다른 분야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국대원 파견때 습득한 다양한 정책분야 공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기와 역경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된  셈이죠!!

 

 

 

 

"국대원 파견때 남들은 밀렸다 했지만 열심히 공부…전화위복"  

 

 

 

□ 조달청장을 거쳐 국세와는 전혀 거리가 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발탁된 것도 큰 화젯거리였는데 그 당시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 제가 서울지방국세청장에서 조달청장으로 승진해 나가자 조달청 내부와 (지금의) 재경부 고위관리자들 사이에 불평이 많았습니다. 자기들 승진 몫을 느닷없이 국세청에서 차지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제가 그리 간 것을 ‘외도(外道)’로 간주하고 곧 다시 국세청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국세청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조달청을 혁신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선 정부공사 입찰과 조달물자 구매에서 ‘복마전’이라는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입찰제 실시 등 모든 조달과정의 95% 정도를 전자조달로 대체시켰습니다. 제도와 시스템 개혁을 대대적으로 한 거였죠.

 

그리고 조달청은 정부기업이고 그에 걸 맞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전통문화상품 개발과 판로 확충을 도모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인정받아 정부와 공기업분야 최우수 개혁기관 등 많은 개혁 관련 수상을 했습니다.

 

당시 저 때문에 조달청 직원들이 매우 고생했습니다. 더욱이 조달행정이 투명해지자 조달청 퇴직 관리자들의 건설업 등 대기업 진출 관행이 막히게 돼 개인적으로는 고생만 시킨 직원들에게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서였는지 몰라도 의약분업 후유증으로 의사, 약사, 제약회사 등 이익단체간 대립이 극심했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승진, 발탁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으로 봅니다.

 


 

□ 국세청에서 김 장관하면 기획력이 특출한 ‘기획통’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럴만한 동기가 있었나요

 

- 제가 남대문세무서장으로 발령이 난 후 90여일도 채 안 됐는데 어느 날 본청 기획관리관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께서 연락이 와 서영택 국세청장의 뜻이라고 기획예산담당관을 맡아 달라는 인사방침을 전달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육원 2년을 거쳐 남대문세무서장을 3개월도 못 채우고 본청으로 왜 들어가느냐고 사양했더니 다른 10회 고시 동기들은 승진을 준비하기 위해 본청으로 들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무슨 소리 하느냐며 ‘무조건 승낙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당시 무척 고민했습니다. 우선 본청 과장 경력이 전혀 없었고 본청 사무관 경력도 전산처리실 관리계장 경력밖에 없어 실질적으로 본청 간부경력이 없었는데 기획과 예산, 그리고 각국 업무를 종합하는 기획예산담당관으로 간다는 게 겁이 났습니다.

 

그래도 제가 본청 기획예산담당관으로서 기획능력을 평가받게 된 것은 기획관리관으로 모셨던 두분,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과 이건춘 전 건설교통부 장관의 탁월한 기획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고생한 기획계장인 김재천 전 대전청장과 예산계장으로 정민웅‧기인호 서장이 열심히 일해 준 결과였습니다.

 

그 당시 이뤄낸 일 중 잊을 수 없는 일은 국세행정 혁신의 사정(司正) 종합대책을 마련했다는 것과 국세청 조사정보비를 대폭 늘리고 징세수당을 신설한 것입니다.

 

서영택 국세청장(건교부장관 역임) 후임 추경석 청장(건교부장관 역임)께서 저를 기획예산담당관으로 일을 시키다가 중부청 직세국장과 조사국장을 거치게 한 후 곧바로 국세청 기획관리관으로 승진 발탁시켜 주신 고마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호남 출신인 저를 조사국장에 기용한 것은 대단한 파격이었죠. 그런 것들이 아마 주변 동료들에게 ‘김성호는 기획통이구나’라는 과대하게 각인을 시켜준 요인이라고 봅니다.

 

  

 

"추경석 국세청장이 중부청조사국장 맡긴 뒤 승진 발탁…잊지 못해" 

 

"관리자는 모를 것 같아도 저 밑에 직원까지 일 잘하나 못하나 다 알아"  

 

 

 

□ 지방청 국장으로 재직하다가 교육원 교학과장으로 좌천당했을 때에 많은 동정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어떤 연유에서였나요?

 

- 80년대 초반 광주‧전남에서 3군데 세무서장을 거친 후 광주지방국세청 직세국장으로 들어가 지방생활 5년여간을 잘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략 5년 정도 지방근무를 하고 나면 능력을 인정받을 경우 서울청 과장이나 수도권 세무서장으로 상경시켜 주는 인사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영택 국세청장이 부임하신 후 첫 인사발령에서 저는 기대와는 아주 달리 초임 서기관으로 승진해 나가는 교육원 교학과장으로 발령받게 됐습니다. 오문희 대전청 간세국장은 교육원 주임교관으로 가구요. 주위 선배와 동료들에게 안됐다고 동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당시 국세청장이신 서영택 전 건교부 장관께서는 ‘한직의 중요성, 중요하지 않은 보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본청 기획예산과 행정관리담당관이나 교육원 과장 등 그동안 소위 한직으로 간주되는 보직에 열정있는 서기관들을 과감하게 발탁(좌천)시킨 첫 인사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안 좋았지만 ‘누구인가 국세공무원 1만8천여명을 양성시키는 일이라면 어차피 내가 이 일을 해내는 것이 국세행정 발전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해 2년여동안 소양 및 인성교육 강화, 조세범 전문과정 신설, 국제조세과정 전문화 등 여러 일을 한 것이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당시 서영택 국세청장께서는 교육원을 자주 방문해 격려를 해줬습니다. 그리고 교육원에서 고생한 것을 인정해 박경상 교육원장(전 국세청 차장 역임)과 이상혁 교육원장(전 서울청장)의 추천으로 서 청장께서는 저를 남대문세무서장으로 영전시켜 줬습니다. 곧바로 기획예산담당관까지.

 

 

 

저는 그 때 느꼈습니다. 한직에 있을 수록 불평을 안하고 더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윗분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발탁해 준다는 사실을.

 


 

□ 일선세무서 과장에서 곧바로 세무서장으로 승진해 나간 것도 파격적인 일로 화젯거리가 됐는데요?

 

- 1974년도에 국세청 전산처리실 관리계장으로 무려 3년이상 근무하다가 일선세무서 과장으로 고시 동기들보다 늦게 나가게 됐죠. 2〜3군데 세무서 과장을 거치고 있을 때 故 김수학 국세청장께서 사정비리로 인한 불명예를 씻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차원에서 가히 혁명적인 ‘지역담당제 폐지’에 나섰습니다. 시범세무서 관리자와 직원들은 정기인사 전에 미리 선발했는데 제가 시범세무서인 남대문세무서 부가2과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지역담당제 폐지이후 남대문시장 자율화 추진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김수학 국세청장께서 자주 남대문세무서와 남산세무서를 순시하시다 보니 그런대로 제가 부가세 업무를 수행한다고 인정해 주셨고 지창수 서울지방국세청장께서는 전국 VAT 1번지라 할 수 있는 종로세무서 부가세과장으로 영전시켜 줬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10회 동기들은 본청과 지방청에 들어가 서기관 승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저는 일선에 머물러 있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육원 부가세법 겸직교관으로 최선을 다했죠. 비록 일선에 있었지만 교육가면 항상 전체 1〜2등을 하게 되고 근무평점도 잘 받게 되어 서기관 승진 전국서열 2〜3위권 안에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안무혁 사회쟁화위원장께서 국세청장에 부임하신 후 대대적인 인사혁신을 하다 보니 서기관 승진 자리가 많이 늘어나게 돼 운이 좋게도 일선 과장에서 순천세무서장으로 곧바로 승진하는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

 

 

 

일선 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지만 모든 노력을 다해 묵묵히 일하다 보면 언제인가 반드시 발탁되는 기회가 온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 국세행정 발전방향은 어디에 역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금 중국 등 세계경제의 어려움이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 세수가 부족해 국세청이 아주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럴 때일수록 정도(正道)세정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 전임 김덕중 국세청장이 합리적으로 일을 해 온 것을 이어받아 임환수 국세청장도 국가재정 확보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무리하지 않는 세정을 전개해 ‘가렴주구’한다는 목소리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국세청 간부들과 직원 모두 고생 많이 하고 있습니다.

 

좋은 전통을 굳게 이어받아 ‘강한 힘있는 국세청, 단결력있는 국세청, 친절한 서비스의 국세청’으로 계속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 현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꼭 조언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제가 세무서장, 지방청 국장과 청장, 그리고 차관급과 장관 등 윗자리에 있을 때 느낀 점은 꼭 적재적소에 쓸 인재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으면 많은 아래 직원들을 모를 것 같아도 일 잘하는, 성실한 관리자와 직원들은 반드시 알게 되고 등용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한직에 있을 때도 불평말고 더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발탁되는 기회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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