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칸 책장 6개에 앞뒤로 빼곡한 2천여권의 책들. 17년 전 작고한 '설린' 최명근 선생의 애장서 2천여권이 국회도서관에 기증됐다. 한국 조세학의 최고봉인 고인의 학문적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장서들이다.
지난 9월 국회도서관에 14번째 개인문고로 설치된 ‘최명근 개인문고’에는 최명근 조세법학자가 직접 저술한 책과 애장하던 국내서 1천404권, 동양서 320권, 서양서 276권 등이 꽂혀 있다.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학자의 열정이 엿보인다.

국회도서관 의정관 지하1층에 자리한 서고는 일반인은 드나들 수 없지만 도서관 열람신청을 통해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다.
분류작업을 마친 책꽂이에서는 우선 유고작으로 출판된 ‘상속과세 존폐론’과 ‘우리나라 종합부동산세의 위헌가능성’이 눈에 띄었다. 설린조세서원 창립 1주년이 되던 2007년, 학자는 평소 지병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그해 제자들은 유고를 모아 두 권의 책을 펴냈다. 최근까지도 당시의 연구가 학회 주제로 논의되는 등 그의 업적이 긴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설린 최명근 교수 유고집-한국조세의 과제’는 10주기 추모행사를 맞아 지난 2017년 나온 책이다. 논문편 상‧하, 평론편 상‧하로 출간된 이 책에는 대담, 칼럼, 연구 등 최 선생이 남긴 글이 집대성됐다. 당시 학계, 언론사 등 사회 각층에서 최 선생을 추도한 이들이 뜻을 모아 책을 펴냈다.
1981년부터 매년 개정판이 나왔던 ‘세법학총론’은 최 학자의 주요 저서 중 하나다. 조세법의 기본이론을 충실하게 다룬 이 책은 조세법이 체계적으로 발전하는데 주춧돌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법, 조세정책, 세무회계를 하나로 합쳐 서술한 ‘세무학강의’도 전설의 도서다. 과거 “세무학과 1학년은 무조건 공부했다”는 평이 자자한 이 책은 “경제학, 회계학, 법학을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조세학문을 아우를 수 없다”는 최 교수의 의지가 담긴 기본서다. 세무학 정의의 기틀을 정립했다는 의의도 크다.


유족과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학자가 말년에 가장 관심을 둔 것은 ‘조세 철학’이다. 징수의 관점이 아닌 납세자 입장에서 바람직한 조세 철학은 무엇인지 그는 깊이 고민했다. 그 생각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책이 지난 1997년 출간된 ‘납세자 기본권’이다.
나아가 한국의 조세사상은 어떻게 발전했으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문화의 특수성은 무엇인지 노학자는 탐구하고 싶었다. 조세사상사(해럴드 M. 그로브즈 지음, 다카기 가쓰이치 등 공역), Jurisprudence(Edgar Bodenheimer 지음) 등 관련 외서를 수집하며 본격적인 연구에 접어들던 차 세상을 떠났다.
“조세에 대한 학문을 철학적으로 한 차원 높이는 데 동참해 달라”고 강조한 고인과 뜻을 같이 한 동료학자들은 조세사학회를 발족하는 등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단박에 성과를 내기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방아쇠는 당겨졌다. 한국조세연구포럼에서 지난 2018년 ‘설린 최명근 조세대상’을 창설하는 등 학계에서는 그의 유지를 잇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서가 한켠을 돌아보면 버트런드 러셀의 명언록, 소설 지방세, 삼중당 문집, 시 선집 등 조세 분야 외의 책들도 눈에 띈다. 유족의 설명을 빌면 ‘한때 시인을 꿈꾸기도 했다’는 문학 청년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최 선생은 고등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께 시를 제출했다가 “너는 시가 아니라 논리(가 특기)다”라는 평을 듣고 진로를 굳혔다고 한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그는 고려대 법과대학에 진학, 경희대 경영대학원 세무관리학 석사와 동 대학원 법학박사로 졸업한 후, 국세청, 세발심 재산과세분과 위원장,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역임하며 국내 초창기 조세계 발전에 기여했다.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경희대 법학부, 강남대 경영학부에서 유수의 제자들을 길러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난 9월 열린 개인문고 설치 기념식에서는 딸 최미희씨가 어머니의 인사말을 대독하며 “일흔일곱 일기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셔서 아쉬움이 많았는데, 평생 모은 도서가 국민과 국회, 학계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하니 학문으로 후학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신 것처럼 기쁘다”고 전했다.

한편 현재 국회도서관에는 전·현직 국회의원 및 사회 각계 주요 인사들이 2천권 이상 책을 기증할 경우 심의를 거쳐 설치되는 개인문고가 총 14개 운영되고 있다. 조세계에서는 최명근 문고가 최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