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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19. (일)

기타

[隨筆]눈길(민주지산)-下

이종욱(서대구서)


폭설이 퍼붓던 날 공수부대원이 행군 중 조난당한 이후, 길목에 아담한 대피소가 생겼다는데, 젊은 날 떠나간 넋의 외로움을 한결 들어주는지라 잠깐 감상하고 김밥 한줄을 꺼내 먹는다. 한걸음속에 새어드는 사색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나는 쉼없이 걸었다. 물은 흘러야 하고 팽이는 돌아야 하며 사람은 끝없이 걸어야 한다. 멈추면 쓰러지는 운명의 피조물들인 것이다. 이런 운명임에야 부질없는 불평을 던져버리고 낙천주의자가 돼 고단한 일생도 즐기며 살아볼 일이다.

민주지산은 1천247㎡로 지나온 각호산보다 조금 더 높다. 오늘 산여운 일행이 정복하고자 하는 주봉이다. 화려한 폭포나 절경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산등을 타고 두루 골짜기 마을을 살피며 걸으니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백의민족의 정서가 가슴을 타고 흐른다. 봉우리들은 물한계곡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부채꼴을 하고 있어, 길목 중간 중간에서 올라오는 등산객과 만나게 된다.

석기봉을 오르는 초입에 사자같이 버티고 선 절벽을 혼자서 오르기에는 무리인지라 우회로를 돌아가니, 한걸음 앞서 온 세무사님께서 갈림길에서 사방을 살피신다. 등산로를 찾아 오르니 조각이라기 보다는 그림을 그린 듯한 평면적인 구성의 삼안마애불이 있고 바위속에 샘이 있다. 길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하마터면 평지로 뻗은 산길을 따라 홀로 산행을 할 뻔했다.

마음을 추스리고 한층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그림을 본다. 이 그림이 의미가 있음은 긴 세월 나무를 지탱해 온 뿌리를 바라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겠지. 세련된 그림이 아니어서 더욱 가치를 부여받는 것도 드물 것이다. 도구라고는 깨진 돌 정도였을 그 시대, 창을 들고 산을 뛰어다니다가 땀을 씻으며 양지바른 이 곳에 그들의 꿈을 심었던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핏줄이었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것이다.

여러번, 길 아닌 곳으로 내닫는 내발걸음을 되돌리게 한 세무사님을 보니 인생에 있어 경험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겸손하기 어렵다는 말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한 번 가본 길도 아닌 데도 길목을 잡아내다니 경험과 차근히 살피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뾰족이 솟은 석기봉, 물한계곡과 영화 '집으로'의 촬영장이었던 상촌면을 바라보며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할머니처럼 앉아 있다. 기다림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우리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려지만 실상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석기봉을 내려 서려니 입구에 또 그 밧줄이 드리워져 있다. 석기봉에서 바위를 타고 내려오니 팔각정 앞에서 산 대장님이 반갑게도 사진을 찍어 주신다. 낙오되지 않고 제대로 찾았는가 보다. 선두그룹은 식사를 마치는 중이었다. 학교시절 시간마다 도시락을 먹듯 산 하나 넘을 때마다 한줄씩 먹은 김밥 탓에 더 먹을 점심도 없어 곧 선두를 따라 나아간다.

석기봉에서 삼도봉으로 가는 길은 빙화의 천지이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이 다이아몬드빛 꽃의 수명은 이틀이나 될까. 귀한 것일수록 옆에 두기 어려운가 보다. 철쭉 가지에 몸이 부딪힐 때마다 샹들리에처럼 드리워진 빙화의 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니 머리가 시원해진다. 떡깔나무 같은 것에 주렁주렁 달린 얼음꽃은 무슨 열매를 키우려나. 하여간 주인은 풍년이라네.

경북 김천, 충북 영동, 전북 무주가 함께 만나는 삼도봉에 도착해 선두그룹에 들었음을 자축하며 삼도화합탑을 등지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긴다. 멀지 않은 곳에 덕유산 머리에 위치한 무주리조트가 서너 갈래 눈길로 뻗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나라를 끝임없이 고민하게 하는 지역감정을 해소하고자, 세마리의 용이 손을 맞잡음을 시샘하듯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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