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고 안했다가 뒤에 말썽나지 않을까요?"
"글쎄 그게 좀 걸리기는 한데…. 그래도 이걸 어떻게 보고하나."
80년대 중반 어느날. 국세청 감독관실은 수차례 반복해서 올라오는 하나의 '첩보사항'을 놓고 며칠전부터 머리를 짜냈지만 별로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안이 워낙 고약했기 때문이다.
요지는 국세청 사령탑 某인사의 친형(兄)이 일선 세무관서와 지방국세청 등을 들락거리며 세무공무원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편을 잡고 있다는 이 '형'이라는 사람이 심지어 세무서장을 몇사람 영전 또는 승진시켰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런 소문은 급기야 인사청탁을 유인해내기까지 했다.
첩보에 대해 어느 정도 사실확인까지 마친 감사관실은 어떤 형태로든 이런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겠는데 그것이 간단치 않았던 것. 행위자가 국세행정 운영 절대권자의 친형이라는 탓도 있지만, 첩보내용의 행위를 딱히 꼬집어 범법으로 단정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아 '사건화'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자칫 '괘씸죄'에 걸릴 수도 있는 데다 설사 문제를 삼는다 해도 이해당사자들이 제대로 증언을 해주지 않으면 행위 자체를 입증할 방법이 없는데, 당시 분위기상 '정확한 증언'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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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의 실마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풀렸다.
평소 나름대로 소신과 사명감이 있다고 자부해 온 서울시내 某세무서장 A씨도 국세청 실권자 형의 적절하지 못한 처신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었다.
-만약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끈 하나 잘 잡았다 생각하고 손을 좀 비벼볼까? 아냐. 그럴순 없어…. 한낱 서생에 불과한 사람한테 이유없이 손을 비빈다는 건 국세청 서기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그런데 얼마뒤 그 서장한테 그 형이 '접근'을 해 온 것이다.
어느날 서장실에 불쑥 들어선 '형'은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서장한테 이렇게 말하더란다.
"고생이 많다면서요? 도와줄 것 없나요? 아우가 성격은 좀 강한 것 같지만 인정은 참 많아요.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이해하고 열심히 하세요."
'소문대로구나. 이것이 아니다'고 판단한 A씨는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총무과장이 뭐라 하던가요? 전 그런 부탁을 드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의외의 답을 들었는지 '형'은 "그런게 아니라 지나다가 그냥 들렀습니다. 이만 갈랍니다."
A씨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이다 보니 선생님의 참뜻이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세무서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결국 그것이 아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리고는 '선생님의 그런 행동을 국세청이 파악하고 있으나 자칫 민망한 일이 될 수 있는 일이라서 관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덧붙혔다. '알고 있으나 조치를 못하고 있다'는 말은 순전히 A씨의 예단이었지 실제로 확인된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이 제대로 약발을 발휘했다.
"서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듣고보니 참 부끄럽네요."
서장 손을 덤썩 잡은 '형'은 '이유 불문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어떻게 잘 좀 안되겠냐'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며칠후 임관동기모임에서 A씨는 국세청 감사관실 관계자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 형 말야,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해놨어. 사람이 순진한건지…. 알아서 긴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더라고."
한 세무서장의 당찬 행동이 '아린 이'를 뺐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