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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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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寸鐵活仁]거지(乞客) 使行二千里

-錦南公 鄭忠信 傳記에서


 

이곳 광주광역시에는 금남로(錦南路)라는 가장 넓고 큰 간선도로(幹線道路)가 있다.
25년전 5·18 광주민주항쟁(光州民主抗爭)의 주전지(主戰地)(?)로 광주시민과 인근(隣近) 도민의 함성(喊聲)과 비명(悲鳴)이 천지에 메아리치던 곳.

그 명칭의 주인공 금남군(錦南君, 鄭忠信의 封號)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행적(行蹟)을 한가지 적어본다.

명장 권 율(權 慄) 장군이 임진왜란때 광주목사(光州牧師)로 있을 때의 일이다.

왜침(倭侵)이 있자 호남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수천명의 의병(義兵)을 이끌고 호남 각지에서 왜적(倭賊)을 대파(大破)하고 그 승전보(勝捷報=전쟁에 이김을 알림)와 함께 호남의 정세(情勢)를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머무는 곳)에 알려야 하는데 왜병이 전국 각지에 가득해 장계(狀啓=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전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의병 중에 가장 나이 어린 정충신(鄭忠信) 소년이 그 사자(使者)를 자청(自請)하고 나선 것이다.

때는 삼복(三伏) 더위였다. 행동이 민첩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난 정공(鄭公)은 온몸에 옻칠을 하고 나병환자(癩病患者=문둥병)로 가장(假裝)하고 왕에게 올릴 장계(狀啓)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맬방(배낭)을 만들어 등에 지고 걸인행색(乞人行色=거지꼴)으로 광주에서 의주(義州)까지 이천리(二千理) 먼 길을 떠났다.

별로 배운 것(학식)은 없었지만 천품(天稟=타고난 재질)이 영민(英敏)한 정공(鄭公)은 천문지리(天文地理=하늘과 땅의 생긴 모양)에도 능통(能通)해 용하게 적진(敵陣)을 피해가다가 더러는 왜적(倭賊)의 정탐(偵探=몰래 적의 형세를 살핌)을 위해 일부러 적진(敵陣)에 찾아들어 걸식(乞食=비럭질)을 하면서 밤낮으로 북행(北行)을 계속했다.

그래서 무사히 의주행궁(義州行宮=의주에 있는 왕이 잠시 머무는 궁전)에 당도한 그는 등에 매고 간 맬방을 풀어 장문(長文)의 장계(狀啓)를 원장(原狀)대로 만들어 왕에게 바치는데 성공했다.

그때 오성 이항복(李恒福)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왕을 호종(扈從=모시고 따라감)하고 있었는데, 정충신(鄭忠臣)의 비범(非凡)함을 알아차린 그는 정 소년(정충신)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손수 글을 가르쳤다. 이에 학문(學問)은 날로 깊어가고, 물리(物理)에의 깨달음이 빨라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뛰어난 재간(才幹=일을 처리하는 재주와 능력)을 발휘했다.

정공의 상관(上官)이자 스승인 이항복(李恒福) 선생은 일찌기 이런 말을 했다.

'정충신이 칼(武)을 버리고 붓(文)을 잡으면 일대의 명사(名士)가 될 것이다'

그해 겨울 무과(武科)에 급제(及弟)한 정공(鄭公)은 인조(仁祖) 2년에 일어난 이 괄(李 适)의 난(亂)에 도원수 장만(都元帥 張晩)의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돼 대공(大功)을 세웠으며 그후 승진(昇進)을 거듭해 포도대장(捕盜大將)과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 兵馬節度使)를 지내는 등 출장입상(出將入相=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돌아서는 宰相)의 훌륭한 명신(名臣)이 됐다.

그리고 학문에도 뛰어난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 백사북천록(白沙北遷錄) 등의 많은 저서(著書)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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